나비에서 꿩으로
변덕쟁이 조삼모사
그리고 천지(天地)는 큰 개념이고, 만물(萬物)은 그 안에 있는 작은 개념이지요. 천지보다 더 큰 개념으로 올라가면 道에 이르고, 만물보다 더 작은 개념으로 내려가면 아주 작은 미물에 이릅니다.
道에서 내려다보면, 천지와 만물 모두가 하나로 통하지요. 괜히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여 이름을 붙이고, 또 궤변론자들은 사람이 지어낸 이름을 가지고 말장난을 해서 혼란을 초래합니다.
말하자면, 나무의 작은 줄기이든 큰 기둥이든; 추한 사람이든 아름다운 서시(西施)이든 모두道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로 통합니다. 만사만물은 나뉘어 흩어지는 것이고; 흩어짐은 곧 생성(生成)하는 것이고; 생성함은 또한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은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그들 서로를 구별하는 경계가 무너져, 생성과 소멸이 하나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수신(修身)하여 득도의 경지에 이르면, 만물이 변화 발전하는 순환의 도리도 하나로 같아지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온 정신을 집중시켜 어느 한쪽 귀퉁이만을 보고 있는 사람, 만물의 규율이 모두 같다는 도리를 모르는 사람을 ‘조삼(朝三)’이라 부릅니다. 어찌 ‘조삼’이라고 했는가?
원숭이를 기르는 노인이 원숭이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말했습니다.
‘아침에 세 개 주고, 저녁에는 네 개를 주마<조삼모사(朝三暮四)>’하니까 원숭이들 모두가 화를 냈습니다.
그러자 말을 바꾸어 ‘아침에 네 개를 주고, 저녁에 세 개를 주마 <조사모삼(朝四暮三)>’라고 하자, 원숭이들 모두가 좋아했다고 합니다. 알고 보면 노인이 원숭이들에게 한 말은 앞뒤만 바뀌었을 뿐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원숭이들은 이런 때는 화내고, 저런 때는 좋아한 것이지요. 이는 어리석은 원숭이들의 심리작용에 따라 나타난 현상일 따름입니다.
‘조삼모사’는 간사한 꾀로 남을 속여 희롱할 때 또는 변덕이 심하여 믿을 수가 없을 때, 원숭이처럼 미련하여 잘 따져보지도 않고 감정에 치우치는 어리석은 사람이나 변덕쟁이를 가리켜 조롱할 때 쓰는 말입니다.
사람은 모두 각자의 자의식이 있기 때문에, 서로 만나 소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소인은 자신의 자의식을 앞세우지만, 성인은 자신의 판단을 유보하고 타자의 생각을 존중합니다.
음과 양의 두 기운이 충돌하지 않고 공존하면서 4계절을 이루어내며 돌아가는 자연의 운행규율을 ‘천균(天鈞 자연적 균형)’이라합니다. 이처럼 나와 타자의 생각을 병행하면서도 서로 부딪히지 않고, 시비의 양쪽을 그대로 인정하며 이루는 균형을 ‘양행(兩行)’이라 합니다. 소통은 타자의 자의식에 바탕을 두고 조화를 이뤄야합니다.
결국 원숭이를 기르는 노인은 원숭이의 심리를 파악해 원만하게 소통을 한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