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베이징특파원 조용성 기자 =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중국의 직업외교관 중 최고위직인 외교담당 국무위원을 지냈던 다이빙궈(戴秉國)가 50여년에 걸친 외교관 생애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는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이 20111년 5월과 8월 중국을 방문했을때 수행했던 인물로 우리나라에도 익숙하다.
최근 '전략대화-다이빙궈 회고록'이라는 책을 출간한 다이빙궈는 8일 신경보와의 인터뷰기사를 통해 그의 외교관 인생을 소개했다. 이 책에서 다이빙궈는 2003년에서 2013년까지 미중협상, 중러협상, 중인협상, 중일협상, 중프협상을 비록해 한반도핵문제와 대만문제 등과 관련해 중국 정부 특사로 활동한 기간을 기록했다.
◆"외교관,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홍위병들이 베이징의 소련대사관에 몰려들었었던 일화도 소개했다. 그는 "당시 말단직원이었던 나는 곧바로 소련대사관에 가서 대사관 담을 넘으려는 홍위병들을 말리는데 고초를 겪었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외교관은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며 "죽음을 두려워하면 외교를 하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상급자에 직언을 아끼지 말아야"
그는 "상급자가 본인의 의견과 다른 의견을 듣기 싫어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며 "상급자라면 이치에 맞는 의견은 받아들일 것이라는 전제로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주소련 중국대사관에서 일하던 시기 상급자와 심한 언쟁을 벌였었고, 이후 그는 내심 "아차" 싶었지만, 결국은 그 상사가 이후에도 자신을 중용했었다는 일화도 공개했다.
2003년 사스가 창궐했던 시기도 털어놨다. 그는 "당시 거리는 텅 비었고 인민들은 공포로 가득했다"며 "마침 그때 아세안이 사스를 주제로 한 토론회를 개최했고, 나는 부랴부랴 원자바오(溫家寶) 당시 총리를 설득해 참석토록 했다"고 말했다.
◆소련의 해체
과거 냉전시기 공산진영의 핵심이었던 소련이 변화를 꾀하던 당시인 1989년 5월 고르바초프가 베이징을 방문했었다. 당시 덩샤오핑(鄧小平)은 직접 "고르바초프와 악수는 하되, 포응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다이빙궈는 당시를 회상하며 "덩샤오핑은 고르바초프의 방중을 두고 몇년간 고민했었다"며 "이처럼 지도자가 직접 세부지침을 정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말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된 이후 중국은 소련의 중량감있는 지도자들을 베이징으로 초청해 소련해체의 원인과 교훈을 직접 들었다. 이 과정에서 핵심역할을 했던 그는 "당시의 면담들이 중국에 큰 도움이 됐다"고 평가했다.
◆원칙과 유연성의 사이
그는 "외교관은 원칙을 지키는 동시에 책략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며 "원칙을 어느 선까지 지키며, 유연성은 어느 선까지 발휘하는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해야한다"고 말했다. 강경자세로 나가야 할 때는 강경해야 나가되, 어긋난 언사를 사용해서는 안된다고도 덧붙였다. 그는 "무거운 말을 적은소리로 하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예정대로 처리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그는 "이미 국가의 승인과 검토를 거친 사항들을 준수해야 한다"면서 "하지만 협상현장에서 상대방의 정책이해도, 우호적인 분위기, 외교적인 기술의 숙련도, 인간적인 매력 등이 예정된 사항에 영향을 끼친다"고도 소개했다.
◆외교관의 퇴임 이후
다이빙궈는 "외교관은 대부분 불면증 혹은 수면부족에 시달린다"며 "국무위원 후반기때 나는 매일 밤 수면제를 두알씩 먹었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퇴직하자마자 수면제를 모두 버렸고, 불면증이 싹 사라졌다고 소개했다. 이어 "(외교관은) 퇴직하고 나면 최대한 빨리 대중의 시선에서 사라져야 하고, 마지막에는 완전히 잊혀져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1941년생인 그는 중국내 소수민족인 토가족 출신으로 쓰촨(四川)대 외국어과를 나와 1964년 공직을 시작했다. 1997년부터 2003년까지 중앙대외연락부 부장을 역임했으며 2003년부터 2008년까지 외교부부부장을 거쳐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외교담당 국무위원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