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에 귀천은 없다. 이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어린 필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요즘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요즘 아이들이 되고 싶어하는 최고의 직업은 가수, 탤런트 등 연예인이다.
각종 TV 채널에 넘쳐나는 먹방과 요리 프로그램의 영향으로 ‘쉐프’라고 불리는 요리사도 인기다. 야구 축구 골프 등 유망 운동종목에는 지망생이 넘쳐난다. 여자 경찰과 여자 군인은 물론, 남자 간호사도 많아지고 있다.
지난 주 우리 언론이 발칵 뒤집어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일자리의 질(job quality)에 관한 나라별 비교통계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나라별 물가와 환율의 차이를 감안한 구매력평가(PPP)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시간당 소득은 14.6달러에 불과했고, OECD의 33개국 중 22위다.
네덜란드 35.0달러, 독일 31.2달러에 비하면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다른 서구 선진국에 비해 소득수준이 크게 떨어지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소득불평등이다.
즉 우리나라의 소득 불평등은 33개국 중 4위로, 다른 선진국에 비해 심한 편이었다. 그만큼 우리나라 비정규직과 중소기업의 일자리가 열악하다는 것이다.
특히 연간 근로시간은 2,124시간으로 멕시코에 이어 두번째로 길다. 독일의 1,302시간에 비하면 4개월 정도 더 일하는 셈이다.
더 일하면서도 소득은 낮으니 일할 맛이 안 난다. 생산성은 형편없고 기업의 수익성이 낮아지는 한편, 다시 1인당 소득이 낮아지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이처럼 일자리의 질이 나빠지면 삶의 질도 낮아진다. 피곤한 상태에서는 집안일도 제대로 나눠서 할 수 없다. 결국 아이를 낳기도 키우기 힘들어지니, 국가 전체적으로 저출산 상태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우리의 합계출산율은 1.2로 세계 최저 수준이다.
일자리가 늘어나면 일자리 수준은 나빠질까 좋아질까? 고용의 양과 질은 비례할까 아니면 반비례할까? 앞의 OECD 보고서에 따르면 비례한다. 고용률이 높은 나라일수록 시간당 소득도 높고, 노동시장의 안정성도 높고, 근무환경도 좋다.
지금 노동개혁이 핫 이슈다. 정부는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노동시장이 더 유연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년이 연장되니 임금피크제가 도입돼야 하고, 성과평가를 통해 저성과자는 평소에도 해고가 가능하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정부가 놓치는 것이 있다. '고용안정성'이다. 정부는 고용의 유연화 조치와 함께 실업자의 사회적 안전망도 강화해야한다. 물론 정부는 실업수당의 최장 지급기한을 8개월에서 9개월로 늘리고 실업급여 지급액도 소폭 인상했다.
하지만 정책 효과를 체감하기에는 변화의 폭이 너무 미약했다.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이 2년에 걸친 실업급여를 통해 새로운 직업을 물색하기 쉽도록 지원해 기업 차원의 자유로운 인력 구조조정을 뒷받침했던 것에서 힌트를 얻어야 한다.
소위 기업 차원의 고용유연성과 국가 차원의 고용안정성이 동시에 추구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때 비로소 우리나라도 생산성과 고용률이 올라가고, 나아가 고용의 질도 높아지는 선순환 효과가 발생할 것이다.
이처럼 일자리의 질이 높아진 후에야 소비를 촉진하는 정책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소득은 낮고 일자리는 불안하고 노후도 불안한데 누가 소비를 늘리겠는가?
집값을 안정시키고 주거비 부담을 낮춰주는 조치도 필요하다. 그래야 소비할 수 있는 여력도 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 가계는 주거비와 가계부채로 인해 이자를 제외하면 소비할 여력이 없다고 아우성이다. 그래서 소비는 계속 줄고 있다. 해법은 결국 일자리와 소득의 문제로 다시 되돌아간다.
직업의 귀천은 없지만 ‘일의 품격’(job quality)은 따져봐야 한다. 개인은 창의적이고 효율적으로 일하며 가사를 분담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는 주거비와 자녀 교육비에 대해 걱정없는 나라를 만들어야 출산율도 올라가고 경제도 발전한다. 이처럼 ‘일의 품격’은 남의 일이 아니다. 모두가 함께 만들어 가야 한다. 나라의 존망을 좌우하는 중차대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