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수원시 평동 4번지는 SK그룹의 모태인 선경직물공장이 있던 곳이다. 선경직물공장은 1944년 4월 담연(湛然) 최종건 SK그룹 회장이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한 뒤 얻은 첫 직장이었다.
담연은 6.25동란 직후인 1953년 8월 정부 귀속재산이던 선경직물공장을 인수했다.
하지만 직원들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어떻게 회사를 살릴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이에 담연은 “안 되는 것이 어디 있나? 방법을 찾아내 할 수 있게 만들어야지”라며 직원들을 독려했다.
공장을 인수하기 전부터 담연은 마음속에 폐허의 현장에 세운 한국 제일의 직물공장을 그려놓았고,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도 짜놓았다. 신제품 개발이었다. 전쟁 후 바닥으로 곤두박질 친 국가 경제상황속에서 국민에게 싸고 품질좋은 생필품을 공급하는 것이 당면 과제였다. 담연이 공장을 다시 일으키면서 신제품 개발을 추진한 이유였다.
대표적인 제품이 나일론이다. 나일론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한국전쟁때 미군이 부산항에 들어오면서 부터다. 나일론의 인기는 좋았으나, 국내 기술로 생산하지 못하던 시절이다.
나일론을 개발해야겠다고 결심한 담연은 실무진에게 이를 지시했다. 하지만 숱한 연구에도 실패만 거듭한 실무진들은 방법을 찾지 못해 개발이 어렵다며 포기하자고 이야기했다.
담연은 이 때도 “안 되는 것이 어디 있어? 안 되면 되게 해야지”라고 호통치며 실무진을 독려했다. 담연이 직접 나서 당시 기술이 앞섰던 일본으로부터 생산 노하우에 대한 정보를 얻어와 결국에는 나일론 국내 생산에 성공했다.
‘추진력이 강한 저돌적인 사업가’로 불리는 담연은 인재에 대한 욕심도 커 꼭 필요한 인재라고 생각하면 삼고초려(三顧草廬)를 마다하지 않았다.
회사 규모가 커지자 담연은 회사 관리를 책임질 인물을 물색한 끝에 직물업계의 중진을 영입하기로 했는데, 처음에는 단칼에 거절당했다. 회사 규모로 봤을때 당시 선경직물은 작은 회사에 불과했으니, 훨씬 큰 회사에서 근무하던 사람이 만족할리 만무했다.
담연은 포기하지 않고, 그를 세 번이나 직접 찾아가는 정성을 보였다. 담연의 열정과 정성에 감동한 그는 세번째 제안에서 최 회장이 내민 손을 잡았다. 쉽게 포기하지 않고 방법을 찾아내 되게 만드는 최 회장의 집요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시작하지 않으면서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다. 노력하지 않으면서 실패를 두려워한다면 비겁하다”는 그는 어떤 도전과 어려움 에도 ‘안 되는 것이 없고, 안 되면 되게 한다’는 강한 도전정신과 실행력을 보여줬다. 이런 담연의 정신은 SK그룹이 재계 3위로 발돋움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