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죽음을 택한 베르테르는 체념한 듯 처연했고, 꿈을 꾸듯 아련했다. 베르테르가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자 그의 한결같은 사랑을 형상화한 해바라기들이 하염없이 스러진다. 시린 핏빛 노을이 그를 함몰시킨다. 지난 10일 개막한 뮤지컬 '베르테르'의 마지막 장면이다.
찬란한 연기를 선보인 배우들에게 기립으로 보답하고 싶었지만 가쁜 숨을 토해내기에도 버거웠다. 남편이 있는 여인(롯데)을 사랑한 베르테르의 절망, 자신의 마음을 너무 늦게 깨달아 버린 롯데의 낙망, 아내 롯데의 진심을 눈치챈 알베르트의 좌절, 죽음으로 정인을 지킨 카인즈의 서러운 열정이 응축돼 돌처럼 몸을 짓누르기 때문이다. 퍽 여러 번 공연을 봤는데도 그 무게감은 좀처럼 적응되지 않는다.
뮤지컬 '베르테르'는 괴테가 친구의 약혼녀를 짝사랑했던 경험담을 바탕으로 쓴 고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원작으로 한다. 2000년 초연해 15년간 12차례나 공연되며 한국 창작뮤지컬의 역사를 새로 썼다. 특히 이번 공연은 배우 조승우가 13년 만에 타이틀롤, 베르테르를 맡아 화제가 됐다.
조승우는 본인의 티켓파워나 원작의 힘에 기대는 요령은 피우지 않는다. 자신이 이룬 관록은 모두 벗어버리고 무대에 올라 20대 청년의 설익고 뜨거운 감정을 단단히 쌓아올려 베르테르가 겪은 설렘과 좌절, 절망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체화된 노련함은 빛이 난다. 그의 애드리브는 타율이 좋고, 그러다가도 단박에 관객을 절망의 나락으로 빠뜨린다.
형상화된 롯데의 아름다움을 실현하는 이지혜, 오르카 역을 통해 오랜 세월 '베르테르'를 든든하기 지켜온 최나래를 필두로 한 앙상블은 모두 제 몫을 해내 '베르테르'를 '조승우 뮤지컬'로 머물게 하지 않고 '좋은 작품'으로 만든다. 베르테르 역으로는 엄기준, 그룹 슈퍼주니어 멤버 규현, 조승우가 번갈아 가며 무대에 오른다. 내년 1월 10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