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위고의 소설 ‘웃는 남자’는 슬프다. ‘레미제라블’만큼이나 가슴 아프고 감동적이다. 겉으로는 웃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울고있는 남자 ‘괭플랜’에 관한 이야기다. 장사익의 노래 ‘찔레꽃’도 슬프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웃고 있다. 슬픈 노래를 부르며 겉으로는 울고 있지만 속으로는 웃고 있다는 얘기다. 노래 부르는 게 행복해서다.
장사익은 늦깎이 소리꾼이다. 60대 중반을 넘겨 칠순을 바라보지만, 가수로 데뷔한지는 20년밖에 되지 않았다. 몇년전 예술의 전당에서 장사익의 ‘찔레꽃’ 공연을 본 적이 있다.
그의 노래가 묵은 장맛처럼 깊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쉬운 노래를 감동적으로 부르고 관객들이 거기에 교감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의 인생에 답이 있다. 그는 상고를 졸업하고 보험회사에 취직했다. 군대를 마치고 나와 보니 다니던 회사는 다른 회사가 돼버렸다.
무역회사에 들어갔다. 1970년대 석유위기로 그 회사도 문을 닫았다. 딸기장사를 하고 가구 외판원을 하고, 연구소 경리과장도 했다. 금성알프스전자와 청계천 전자상가의 직원이기도 했고, 독서실을 운영하다 급기야 매제가 운영하는 카센터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15번째 직업이었다.
그러다 태평소를 불고, 노래를 부르게 됐다. 행복했다. 소리꾼과 예술인은 그의 16번째 직업이 됐다. 그리고 그의 인생이 바뀌었다. 처음으로 일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직업을 갖게 됐는데. 그의 나이 45세 때의 일이다. 이처럼 숙성된 인생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속깊은 목소리가 관객의 심금을 울렸다.
그가 요즘 청년세대들에게 한마디 했다. 제발 대기업만 기대하지 말고, 어디든 부딪혀보라는 것이다. 15전16기를 했던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얘기다. 밥벌이의 지겨움을 글로 썼던 소설가 김훈 역시 젊은 세대들에게 돈과 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물론 1940년대에 태어난 장사익, 김훈의 시대와 1990년대에 태어난 요즘 20대들의 시대는 전혀 다르다. 단순히 50여년의 격차보다 훨씬 큰 차이가 존재한다. 그들이 자랄 때에는 집에 밥이 부족했고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했지만 요즘 청년들에게 밥은 문제가 안 된다. 부모들이 먹여준다. 성취감과 행복감을 느낄 수 없는 직장이라면 아예 쳐다보지도 않으려고 한다. 100만 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일하고 있는 것과도 연결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 쉽지 않다. 청년들에게 눈높이를 낮추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 눈높이를 만든 기성세대와 우리나라 교육시스템, 사회구조에 대해서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
직업을 바라보는 눈에서부터 시작해 직업교육을 정규교육과 조화시키는 문제, 직업훈련을 내실화하는 문제, 취업 처우 승진 등 노동시장에서 학력 격차를 해소하는 문제, 급여 구조를 직무급 중심으로 바꾸는 문제, 중소기업에 대한 시각을 교정하는 문제, 중소기업의 수익성을 높이는 문제 등과 얽히고 설켜 있다.
일단 중소기업에 대한 시각을 바꾸는 것부터 시작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세계시장에서 성공적으로 사업하는 중소기업의 스토리를 많이 발굴해야 한다.
중소기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책을 냈던 슈마허의 얘기가 우리나라에서도 조만간 실현되기를 바란다.
이후 청년들의 도전정신을 주문해야 한다. 벤처기업에서 일하는 청년들이 겉으로도 웃고 속으로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너무 웃어 주름이 자글자글한 장사익의 얼굴이 너무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