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일 정상회담 기대감은 고조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박 대통령 참모들은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스럽게 내디뎌야 정상회담에 다다를 수 있다며 ‘징검다리론’을 내세운다. 이제 정상회담 성사가 지상 과제가 된 듯한 분위기다. 과거사 문제 해결 없이는 한·일 간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을 것처럼 일본을 대하던 때와는 사뭇 다르다.
박 대통령이 대일 외교에 있어서 역사·영토 문제와 경제·안보 협력을 분리하겠다는 ‘투 트랙 정책’으로 갈아 탄 것은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아베 총리의 활발한 정상 외교 앞에서 자칫 외교적 고립을 자초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고조됐기 때문이다. 고집스럽게 과거사에만 매달리는 한국을 못마땅하게 여긴 미국이 태도 변화를 종용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아베 총리의 외교 행보는 주효했다. 그는 지난 4월 하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반둥회의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서로 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나눴다. 아베는 양국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외교적 관례를 깨고 당시 연설문 내용까지 사전에 중국 측에 보여줄 정도로 공을 들였다. 그로부터 5개월 전 베이징에서 시 주석이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것과는 뚜렷이 비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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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자 "박 대통령이 대일 외교에서 과거에만 집착하다 얻은 게 뭐냐"는 지적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국은 건너 뛴 채 주변 강대국들과 관계를 강화하면 한국으로서도 그냥 있지 못할 것이란 아베의 계산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한·일 정상회담이 이뤄지더라도 우리의 바람대로 진행될 수 있을까. 우리가 주도적으로 분위기를 조성한 게 아니라 아베에게 끌려 다니다 상황 논리에 따라 방향을 선회한 것인데도?
그 뒤 일본의 과거사 도발이 있을 때마다 한국과 중국은 공동보조를 취하는 것으로 비춰졌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는 군사적 긴장도 지속적으로 고조됐다. 이러한 상황은 아베에게는 오히려 자신의 입지를 강화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 됐다. 한국과 중국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것을 일본 국민들이 지지했기 때문이다.
급기야 미국은 이달 초 중국과 갈등을 빚고 있는 남중국해 문제를 둘러싸고 한국의 입장 표명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중국과 가깝게 지내는 한국에게 미국 쪽에 줄을 서라는 압력을 가한 셈이다. 대니얼 러셀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이러한 발언을 한 것은 한·미 정상회담을 목전에 둔 시점이었다. 박 대통령의 방미 연기로 일단 잠복된 이슈가 되긴 했지만.
이게 우리가 지금 처한 외교적 지평이다. '강한 일본'을 표방하는 아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뜻하는 '중국꿈'을 내세우는 시진핑 사이에서 박근혜는 너무 왜소해 보인다. 여기에 오바마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까지 겹쳤으니.
강대국이 아니라고 큰 지도자가 나오지 말란 법이 있을까. '싱가포르의 국부'로 불리는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가 좋은 예다. 도시국가에 불과한 싱가포르를 '아시아의 용' 반열에 올려놓아 덩샤오핑(鄧小平)이 중국의 발전 전략을 놓고 자문을 구할 정도 아니었던가.
외교도 내치의 연장이라는 건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다. 내치에서 허우적대는 박 대통령이다보니 외교에서도 힘을 받지 못할까 걱정이 된다. 하지만 이미 많은 걸 기대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그래서 정치체제 개혁을 위한 개헌이 더욱 절실해진다. 이를 통해 지도자와 국가 차원의 역량이 효율적이고도 안정적으로 발휘될 수 있어야 한다.
(아주경제 국제담당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