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박현주 기자 =현란함은 눈속임이다. 화려한 색감을 진정시키고 보자. 그러면 보인다.
'그대여 나와 같다면', 'Money Never Sleeps(돈은 결코 잠들지 않는다)' 'Are you lonely, too?(당신도 외로운가요?)' 'Big Smile(크게 웃어 봐요)'.
혼자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전하는, 암시같은 문구다.
전시 타이틀 '유령 발자국(Phantom Footsteps)'이 힌트다. 물감으로 그린듯한 작품은 다가서면 깜짝 놀란다. 한땀 한땀 수놓은 자수다. 너무나 정교해 한발 떨어져 보면 물감이 튈 것처럼 보이는 생생함이 압도적이다.
'유령 발자국'이라는 타이틀은 이 자수에 답이 있다. 작가는 말 하기를 꺼려했지만 털어놨다. "북한에 있는 자수 공예가들이 작업했다"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떻게?'가 공격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작가는 "작업자체가 긴장의 연속이고 답답해서 속병까지 났었다"고 했다. "국내에서 '야호'라고 외치면 1초 후면 바로 메아리를 듣겠지만, 완성물을 보기까지 1년 이상의 긴 시간이 걸렸다" 의도했던 색깔과 다르게 나오기도 했다. 보냈던 작품이 실종되기도했다. "10개 중 6개는 중간에 사라졌다"는 것.
작업은 간단한다. 일단 작가가 천에 이미지를 그려넣고 디지털 프린트를 한다. 이 프린트가 제 3자에 의해 중국에서 북한으로 들어간다. 북한 자수공예가들에게 은밀하게 건네진 후 작업이 시작된다. 디지털프린트 천에 칠해진 색 위에 자수가 수놓아져서 모아져 돌아오는 식이다. 몇 명이 어떤 환경에서 작업했는지는 작가도 모른다. 색감이 현란하고 짙은 이유가 있다. 작가는 "파스텔톤으로 보낸 색감은 진해져서 온다. 북한 자수가들은 흐린색보다는 진하고 강한 색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했다.
2008년 말부터 이러한 작업을 해 왔다는 작가는 "현재 계속 진행형인 작업"이라며 더욱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는 않았다.그 는 "중국 등의 중간자를 통해 북측 노동자들에게 이를 전달하고 같은 경로로 다시 돌려받는 방식을 취했다"며 "여러 루트를 통해 이뤄졌는데, 매번 그 과정이 달랐다"고 말했다. 북한의 자수공예는 세계적으로 탁월해 수많은 사람들이 자수를 하지만 북한 당국에서도 '외화 벌이'이기 때문에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 같다는 게 작가의 느낌이다.
왜 이렇게까지 이런 작품을 하게 된 걸까. 2008년 서울 마포의 집 대문 앞에서 삐라를 발견한 경험에서 시작됐다. 북쪽에 있는 불특정 대상에게 전달되는 예술적 메시지를 기획했다고 한다.
작가는 자신이 작품에 새겨놓은 문구를 북한 사람이 자수를 놓기 위해서 텍스트를 어쩔 수 없이 읽고 보게 되는 행위가 '삐라'와 비슷한 기능"이라고 생각한다. "익명의 타자들과의 소통, 공간적 거리와 이데올로기적 장벽을 뛰어넘는 소통의 시도 자체, 그것을 둘러싼 과정 모두가 작품"이라는 얘기다. 어떻게 날아왔는지 모를 삐라를 보면서 읽고 느끼는 그 감정처럼, 북한자수공예가들도 은연중에 자수를 놓으면서 문구를 가슴속에 새길 것 같다"는게 작가의 설명이다.
작가는 '추상은 반역'이라는 말을 인용했다. 하나의 구체적인 이미지를 디지털방식으로 포토샵에서 분해하고 추상화될때까지 작업한 화면은 군사적 위장술처럼 지배권력에 대한 모종의 비평적 암시들을 내포한다. 정치적 사회적으로부터 무시되거나 묵인되어온 진실들을 재조명하고 희화화함으로써 우회적으로 사태의 본질을 드러낸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관심이 많았아요. 실재하지만 실재하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예술이고, 예술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는 노동과 조건이 던져주는 날 것의 아름다움을 느껴보시지 바랍니다"
자수회화 작품을 영국 리버풀 비엔날레를 비롯한 해외 행사에서 선보인 적은 있지만, 국내에서 자수작품을 전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북한에서 누가 어떻게 작업했는지도 모르지만, 화려하게 완성되어 돌아온 작품 15점이 모였다. 국제갤러리 2관에는 문구와 이미지로 은유와 카무플라주(camouflage·위장)를 섞은 '문자서비스 시리즈'를 걸었다. 갤러리 3관에는 5개의 대규모 샹들리에 이미지의 자수회화 연작 '당신이 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다섯 개의 도시를 위한 샹들리에'가 전시됐다.
'예술은 소통'이다.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실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손길이 담긴 작품들은 모든 경계를 넘은 채 작렬하는 화려함으로 관객을 맞고 있다. 국내에서 6년만의 함경아 개인전은 7월5일까지 이어진다. (02)735-8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