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선생은 1883년 동학에 입도해 1894년 제2차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다.
1908년 천도교 대도주에 임명된 후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 등을 설립해 민족의식을 갖춘 인재를 양성했다. 1919년 천도교 전국 대교구에 등사 인쇄기를 배치토록 해 독립선언서 제작을 지원했다.
천도교 대교당 건축 명목으로 특별 성미를 거둬 3·1운동 자금으로 사용토록 했다. 3·1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고자 조선독립신문을 발간하는 등 배후에서 만세운동도 지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