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사택지적비 보물 지정,백제 의자왕이 사택지적 축출? "일본서기 보니"

2014-10-21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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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사택지적비 보물 지정,백제 의자왕이 사택지적 축출? "일본서기 보니"[사진=부여 사택지적비 보물 지정,문화재청]

부여 사택지적비 보물 지정
아주경제 홍준성 기자 =부여 사택지적비가 보물로 지정되면서 사택지적비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택지적비는 백제시대 말기인 의자왕 때 대좌평(상좌평)의 고위직을 역임한 사택지적이란 인물이 세운 탑으로 말년에 불교에 귀의하고 불당과 탑을 건립한 것을 기념하고 있다.
사택이란 성은 백제의 팔대성의 하나로 지금의 사씨와 같다.

사택지적은 의자왕 때 대좌평을 지냈으나 의자왕이 왕권 중심의 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귀족 40여 명을 섬으로 축줄하였는데, 그는 이때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문헌에는 사택지적에 대한 자료가 없으나 '일본서기' 권24 황극 2년(642) 7월 조에 그 이름이 등장한다.

일본서기에는 "조정에서 백제의 사신인 대좌평 지적 등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

비문의 내용은 "甲寅年正月九日 奈祇城砂宅智積 慷身日之易往 慨體月之難還 穿金以建珍堂 鑿玉以立寶塔 巍巍慈容 吐神光以送雲 아아悲貌 含聖明以□□"이다.

이를 해석하면 "갑인년 정월 9일 나지성의 사택지적은 몸이 날로 쉬이 가고 달로 쉽게 돌아오기 어려움을 한탄하고 슬퍼하여, 금을 뚫어 진귀한 당을 세우고 옥을 깎아 보배로운 탑을 세우니, 높고 큰 자비로운 모습은 신광을 토하여 구름을 보내는 듯하고 아아한 슬픈 모습은 성명을 머금어 □□을 한 듯하다" 로 된다.

이 비는 1948년 부여읍 관북리의 도로변에서 발견됐다. 당시 일본인들이 바닥에 깔려고 쌓아 놓은 돌무더기 속에 있었다.

한편 문화재청은 부여 사택지적비, 경주 월지 초심지 가위 등 8건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부여 사택지적비 보물 지정 소식을 접한 네티즌들은 "부여 사택지적비 보물 지정,사택 성이 사씨 였구나","부여 사택지적비 보물 지정,직접 보고 싶네요","부여 사택지적비 보물 지정,백제 문화 대단하네요"등의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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