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도시를 읽다(24)] 황제의 보물창고에서 세계의 시장으로 '광저우'

2014-11-02 17:54
  • 글자크기 설정

중국도시를 읽다- 광저우시 개요[사진=아주경제 편집부]

아주경제 배인선 기자 =아시아 최대 규모의 종합박람회인 ‘캔톤페어’가 지난 19일 중국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에서 막을 내렸다. '세계 경제 바로미터'로 불리는 캔톤페어는 올해 글로벌 경기침체 영향으로 올해는 다소 썰렁한 분위기였지만 지난 1957년 1회를 시작으로 57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캔톤페어는 중국 대륙에 광풍이 몰아쳤던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빠지지 않고 열렸다. ‘세계의 시장’이자 ‘중국의 남대문’으로 광저우는 중국 대외무역의 첨병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넓은 고을'이라는 뜻의 광저우는 양의 도시(洋城), 이삭의 도시(穗城)라고도 불린다. 고대 이곳에 극심한 가뭄이 이어졌을 때 하늘에서 다섯 마리 양이 다섯 색깔의 벼 이삭을 전해주었다는 데에서 유래했다. 따뜻한 기후 덕분에 꽃이 많아 꽃의 도시(花城)로도 불린다.

광저우는 중국 남부 베이장·둥장·주장 등 세 강이 합류하는 주장삼각주 하구에 위치해 예로부터 항구도시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광저우는 고대 진시황이 점령한 후 남해군(南海郡)을 설치하면서 중국 대륙 역사 속에 처음 등장해 당나라 때 저 멀리 페르시아 지역까지 교역하며 해상실크로드 발상지였다. 당나라 말기 광저우 연간 입항 선박이 40000여척에 달했으며, 광저우 거주 외국인 상인 수가 12만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해금령(海禁令)을 실시했던 명 나라 때도 광저우는 동남아시아 각국의 조공선이 입항하는 중국 대륙의 유일한 통상항구의 관문 역할을 담당했다.

청나라 때 광저우는 중국 도시 최초로 유럽과 교역을 시작하며 항구도시로서의 명성은 절정에 달했다. 당시 서양 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강희제가 1685년 중국 4개 세관, 월해관, 민해관, 절해관, 강해관을 대외 개방해 외국 상선이 입항하도록 했다. 월해관이 바로 지금의 광저우이며, 나머지는 각각 푸저우(福州), 닝보(寧波), 윈타이산(云台山)이다. 이후 1757년 건륭제가 다른 3곳 세관 폐쇄할 때에도 월해관은 그대로 남아 대외무역을 독점하며 청나라 황실에 진귀한 서양 문물과 비자금을 공급하는 황제 보물창고 역할을 수행했다.

월해관에서 활발한 교류가 이뤄지면서‘주광(走廣 광저우로 달려가다)’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세계 각지 상인들이 북적거렸다. 청나라는 광저우에 ‘광저우 13행(13行)’을 만들고 외국상인들과 거래할 수 있도록 허가 받은 ‘제국의 상점’으로 청나라 국고를 책임지도록 했다. 이곳에서 수출된 차와 비단, 도자기가 유럽으로 흘러들어가는 대신 화폐(은)는 중국으로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갔다. 13행에 화재가 나면 사방에 은화가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고 전해질 정도다. 1830년대 당시 광저우 13행 중 하나인 이화행을 소유한 오병감(伍秉鑒) 일가는 당대 세계 최고 부자 중 한명으로 꼽힐 정도로 독점 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쌓았다. 그러나 청나라의 아편전쟁 패배 후 상하이가 개항하며 광저우의 대외무역 독점 메리트도 사라지면서 광저우13행도 몰락했다. 광저우13행은 청나라 흥망성쇠와 명운을 함께 한 셈이다.

아편전쟁 이후 침체된 광저우 경제가 다시 날개를 뻗은 것은 개혁개방 이후다. 개혁개방 초기 상하이·베이징·톈진·충칭에 밀렸던 광저우는 오늘날 중국 베이징·상하이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중국 3대 도시로 떠올랐다. 2013년 중국 광저우 지역 GDP는 1조5420억1400만 위안으로 전년 대비 11.6% 증가했다. 7%대 성장률에 머문 베이징 상하이를 훨씬 웃도는 것이다.

광저우는 든든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도 성공적으로 치렀다. 당시 광저우는 아시안게임을위해 70여개 경기망과 각종 도로인프라를 건설하는 데 무려 20조원을 투입했다.

광저우는 최근 들어 제2의 개혁개방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광저우가 야심 차게 추진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바로 난사신구(南沙新區) 개발이다. 앞서 2012년 국가급 신구로 지정된 난사신구를 최첨단과학과 고급서비스업 집중 발전시켜 중국의 ‘리틀 홍콩’으로 조성하겠다는 계획이다. 특히 최근엔 광저우 당서기 수장자리도 교체됐다. 부패로 낙마한 완칭량(萬慶良) 전 광저우 당서기의 빈 자리에 40대 젊은 피인 런쉐펑(任學鋒) 전 톈진(天津)시 부시장이 임명된 것. 이에 따라 난사신구는 국가급 신구 ‘형님’ 뻘인 톈진 빈하이신구 발전 노하우를 적용해 향후 광저우 지역경제 발전의 새로운 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한편 ‘세계의 시장’인 광저우 사람들은 배금주의에 빠진 장사치로 종종 묘사되기도 한다. 하지만 중국 근대화 과정에서 광저우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민주혁명인 신해혁명이 촉발된 혁명 요람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11년 4월 중국혁명동맹회가 청나라 타도 거병을 일으킨 광저우 황화강 사건이 그해 10월 후베이(湖北)성 우창(武昌)의 신군 봉기로 이어진 것. 결국 신해혁명으로 청조는 무너지고 이듬해 2월 쑨원이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광저우에 수립됐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