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석 여주시장
어린 왕자라는 책이 있다. 아이들 동화 같기도 하면서 제법 심오한 내용으로 어른들도 읽어 보면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제 갓 4살 난 아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는 할까 궁금했지만, 스피커에서 나오는 신기한 음악소리와 앳된 어린 왕자의 목소리에 마냥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모습이 신통할 뿐이었다. 내 자식 어렸을 때보다 손자·손녀가 훨씬 더 예뻐 보인다는 옛 어른들 말씀이 있는데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암튼 손녀 옆에서 무심코 듣고 있자니 마치 아이가 모든 어른들에게 ‘삶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겁니다’하고 훈계하는 것 같았다.
책 첫 머리부터 아이들의 상상력을 이해 못하는 어른들의 무심함과 아이의 친구를 부모의 소득과 집 크기로만 평가하는 어른들의 편협함을 꾸짖는다. 그래서 지은이는 말한다. 어린이들은 미래의 자신이 될 어른들을 관대하게 대해야 한다고.
나는 아니라고 하지만 어딘지 뜨끔함이 느껴지는 건, 나도 어쩔 수 없는 책 속의 ‘어른’에서 비껴 갈 수는 없는 것 같다.
지구에 도착하기 전 어린 왕자가 별들을 여행하며 만나는 사람들이 있는데 각각의 삶이 우리 어른들의 그것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술 마시는 게 부끄러워 그것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신다는 주정뱅이, 은행에 저축해서라도 세상 모든 별들을 혼자 다 갖겠다던 탐욕스런 상인, 숭배 받기만을 바라는 허영꾼 등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우리의 자아상이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여우와 어린왕자의 만남 부분이다. 지구에 친구가 없어 외로웠던 그는 여우에게 친구가 돼 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여우는 ‘아직 길들여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만다. 대신 시간과 노력을 들여 특별한 관계를 만들고 서로 필요한 존재가 될 때, 다시 말하면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길들여졌을 때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알려준다.
그리고 정말로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마음으로 그 소중함을 볼 줄 알아야 하며 이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성우가 읽어주는 책이 다 끝나고 손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문득 아이가 나를 길들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텔레비전과 길거리에서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보기만 해도 손녀가 보고 싶어진다. 매 주말이면 오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하니 길이 들어도 단단히 들은 모양이다.
나는 소통도 길들여짐과 길들임이라고 믿는다. 여우와 어린왕자가, 나와 손녀가 그러하듯 서로 일방적이지 않고 상대방의 몸짓 하나만 봐도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다. 곁에 있지 않아도 기다림 그 자체가 즐겁다.
상대방과 말이 안 통한다고, 꽉 막혔다고 불평하지 말자. 진정 소통을 원한다면 누군가에게 나를 길들여 달라고 말해 보자. 어린왕자에 길들여진 여우가 그전엔 아무 의미가 없던 금빛 밀밭을 보고 어린 왕자의 노란 머릿결을 생각하는 것처럼 그 누군가는 길들여짐으로 나의 진심을 마음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