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번호= 27일 예정된 오후 2시보다 재판은 2분정도 일찍 열렸다. 초췌한 안색의 최재원 부회장이 좀 더 먼저 재판정에 들어와 기다렸다. 이어 수의를 입은 최태원 회장이 등장했다. 최근 건강이 나빠 법정구속집행을 정지 받은 여러 총수들 중에서 유일하게 건강하게 수감생활을 받고 있는 그다.
이어 입정한 재판장 문용선 판사는 최 회장 형제를 비롯한 김준홍 피고인 등에게 주민등록 번호를 외워보라고 시켰다. 앞서 이번 사건의 핵심인물로 지목돼 온 김원홍 전 SK해운 고문이 전날 저녁 국내 송환되자, 이날 재판이 연기되거나 재판에서 변론재개 사실이 공지될 가능성이 제기됐었다.
하지만 재판이 열리고 최 회장이 주민등록번호를 외우는 목소리에 SK 관계자가 많았던 방청석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길었던 얘기= 여느 재판과 달랐던 점은 길었던 설명이다. 판결문인지 판사의 임의적인 설명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문용선 판사는 판결 선고 이전에 2시간 남짓 판결문을 읽었다. 판사 본인도 재판 마지막엔 “재판장이 법정에서 꼭 그런 말들을 해야 하느냐면, 법정에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얘기만 했다고 본다”고 말해 이를 의식하는 눈치였다.
문용선 판사는 “판결 선고 이유가 충분하게 다 성립됐다고 인정됨으로 판결을 선고하겠다”며 운을 뗐다. 이말 직후 인터넷엔 ‘예정대로 선고’ 제목이 달린 1보가 쏟아졌다.
문 판사는 최 회장측이 변론재개를 신청했던 것과 관련, 김원홍 전 고문을 증인으로 채택하지 않고 선고하게 된 이유부터 설명했다. 한마디로 “무슨 증언을 하던 무의미하다”고 표현한 문 판사는 “김원홍에 대해 송환이 됐느니 어쨌느니”라는 말의 뉘앙스로 얼핏 염증을 드러내기도 했다.
◆기만과 술수= 문 판사는 김 전 고문이 제출했던 녹취록에 대해 “출자금 횡령은 김준홍이 김원홍과 함께 최태원, 최재원 몰래 저지른 것이라는 게 핵심”이라며 “과연 그런지 잘 판단할 필요성이 있다”면서도 “녹취록에 나타난 입장은 그보다 더 한 증언이 나오리라 볼 수 없을 만큼 최태원의 주장과 완전 부합한다. 증언이 필요한지 의문”이라고 결론지었다.
문 판사는 또 녹취록에 대해선 “도무지 믿을 수 없어 정보로서 가치가 하나도 없다”면서 그 이유로 “허황되고 탐욕스럽고 기만과 술수에 능하고 쉽게 거짓말을 하는 등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김원홍의 성향”을 들었다.
◆한마디 말= 문용선 판사는 “재판하는 사람이면 단언은 못하겠지만 심문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고 말했다. 또한 “김원홍에게 (최태원 회장이)속아서 횡령한 줄 몰랐다고 주장하는 데 그렇게는 전혀 볼 수 없다”면서 “다만, 김원홍의 인간됨을 보면 뭔가 속았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재판이 끝나고 김원홍 전 고문에 대한 추가 심리가 없었던 것은 논란이 되고 있다. 재판부가 사기성이 보이는 김 전 고문의 성향을 지적하면서도 심문을 하지 않은 것이 반론의 여지를 남겼다. 재판 후 SK측은 “사건을 90% 이상 흔든 인물인데, 한마디도 안 듣고 판결을 내린 것이 억울하다”고 토로했다.
◆1등 사법부= 허위진술 부분을 언급할 때 판사의 목소리가 가장 커졌다. 최재원 부회장이 1심에서 허위자백했다는 주장에 대해 “허위자백이라고 신빙성을 배척할 수 없다”며 “너무나도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며 구체적이라 신빙성 있다”고 판단했다. 결국 1심에서 무죄였던 최재원 부회장은 2심에서 유죄가 됐다.
문용선 판사는 특히 “재계 서열 3위가, 아시아 변방 어디도 아닌 대한민국에서 회장이 아무 잘못 없다면 법무팀 조력 받아서 공식적으로 무죄라고 하면 되지, 무죄인 최재원이 무죄인 최태원을 보호하려고 허위자백을 했다니 웬말이냐”고 꼬집었다.
그는 또한 “검찰·법원이 어떤 곳인데, 한국 법원이 작년, 재작년 아주 권위 있는 기구에서 사법부 수준을 평가했는데 여러 지표로 1등을 했다. 국민들도 이걸 알아야 된다”고 해 방청객 한편에서 웃음소리가 나기도 했다.
◆눈물= 재판이 끝나고 최 회장측의 침통한 분위기는 부인인 노소영씨의 눈물로 대변된다. 판결을 듣고 있던 노소영씨는 끝내 눈물을 쏟았다. 재판이 끝나고 10여분이 흘러가도록 방청객들이 떠나는 와중에도 노소영씨만 재판정을 뜨지 못했다. 측근들의 부축을 받고서야 겨우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