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주요국에서 외국인들의 대규모 '돈풀기'로 막대한 유동성 장세가 펼쳐지고 있지만 한국 증시는 예외다.
28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달 3조5795억원어치를 순매수했던 외국인투자자는 이달 들어 1조5550억원가량을 순매도했다.
이는 지난해 말부터 계속된 원화 강세로 환차익을 노리고 들어왔던 외국인들이 환율이 진정세를 보이자 빠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기업들의 작년 4분기 실적이 실망스러운 수준이라는 점과 세계 최대 운용사인 뱅가드사의 벤치마크 변경 등도 외국인 매도세를 부추겼다.
◆ 환율이 문제
원·달러 환율은 지난해 9월 초 1131원에서 이달 11일 1054.7원으로 6.7% 정도 떨어졌다. 같은 기간 외국인은 유가증권시장에서 5조5000억원가량을 순매수했다.
반면 원·달러 환율이 오르기 시작한 12일부터 28일까지 외국인은 2조원 이상을 팔아치웠다. 원화 강세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환차익을 염두에 둔 투자가 꽤 많았다는 의미다.
삼성증권 유승민 연구원은 "지난해 말부터 계속된 원화 강세로 차익 실현을 노리던 외국인들이 최근 환율 하락세에 제동이 걸리자 매도에 나서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원화 강세로 인한 기업들의 실적 악화도 외국인 투자심리를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꼽힌다.
삼성전자를 포함해 작년 4분기 실적을 발표한 코스피200 기업들 15개 가운데 70%인 11개 기업이 기대 이하의 성적을 내놓았다.
실제 삼성전자는 현재의 환율 수준이 유지되더라도 올해 3조원 이상의 환손실을 볼 것으로 예상된다. 현대·기아차도 원·달러 환율이 10원 떨어지면 매출이 2000억원, 영업이익이 연평균 1% 낮아지는 것으로 추산된다.
하이투자증권 박상현 연구원은 "국내 주력 수출업체의 4분기 실적이 원화 강세로 크게 부진한 것으로 나타나면서 '환율 포비아(공포)'가 확산되고 있다"며 "이에 외국인들이 주식 매도에 나서면서 주가 하락을 이끌고 있다"고 설명했다.
◆ 日증시로 몰리는 자금
한국을 떠난 외국인들은 엔화 약세를 등에 업고 경기회복을 노리는 일본과 아시아의 다른 신흥국 증시로 이동하고 있다.
외국인들인 일본 증시에서 이달 초부터 지난 18일까지 약 68억3000만 달러(한화 7조5000억원)를 순매수했다. 이에 일본 닛케이지수는 작년 12월 1만선을 넘어선 이후 이달 현재 장중 1만1000선을 넘기도 했다.
인도와 태국 증시에도 각각 30억 달러, 4억6000만 달러가량의 외국인 자금이 유입됐으며, 인도네시아(4억8500만 달러)와 필리핀(5억5200만 달러) 증시에도 외국인 투자가 몰렸다.
동양증권 조병현 연구원은 "아시아 신흥국 증시 가운데 최근 3주간 약세를 보인 곳은 한국과 말레이시아밖에 없다"며 "말레이시아는 총선을 앞두고 민심이 혼란스러운 상황이기 때문이고, 한국은 원화 강세와 엔화 약세로 인한 부담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 환율 진정, 외인 귀환
이날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일 대비 19원(1.77%) 오른 1093.50원에 거래를 마감하며 지난해 10월 말 수준을 회복했다. 엔·달러 환율은 91엔에서 90.9엔으로 소폭 하락했다.
이처럼 원화 강세, 엔화 약세 기조는 당분간 주춤할 것으로 예상된다. 독일과 미국 등 여러 나라가 일본 정부의 엔화 약세를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더 이상의 엔화 약세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다.
박 연구원은 "다음달 15일 열릴 예정인 G20 정상회의에서 일본의 엔화 약세 문제가 주요 의제로 다뤄질 수 있어, 이때를 전후로 일본 정부의 엔화 약세 유도정책이 숨고르기에 들어갈 수 있다"며 "여기에 올해 1분기 세계 경기회복에 따라 국내 수출이 증가한다면 2월을 기점으로 외국인의 순매수 전환을 기대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유 연구원도 "지난 2005~2007년도 엔·달러 환율이 16% 오르는 동안 원·달러 환율은 6% 떨어졌지만, 한국 증시는 경기회복을 따라 상승세를 보였다"며 "중요한 것은 환율보다 세계 경기회복"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반대 의견도 있다. 한국 증시 매력이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국가, 심지어 일본보다도 못하다는 것이다.
현대증권 이상원 연구원은 "해외 투자자들은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이 저성장 국면에 접어들었고, 경쟁국에 비해 경기부양 정책의 강도나 성장률이 매력적이지 않다고 평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