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의 성공과 삼성의 눈부신 발전 이면에는 그의 형인 이씨의 희생이 있었다는 게 재계의 평가다.
그는 일본과 미국유학을 거쳐 안국화재 업무부장을 시작으로 중앙일보, 삼성전자 부사장 등 직함이 한때 17개에 달했다. 강도 높은 경영 수업을 받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그룹 안팎에서는 이씨 중심의 후계구도를 의심하지 않았다. 세계 최대의 비료공장을 만들려 했던 선친이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1966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자 그는 실질적으로 그룹을 맡기도 했다.
이씨가 지난 1993년 펴낸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 따르면 선친과 갈라서기 시작한 것은 1973년부터다.
이병철 창업주는 17개에 달했던 이씨의 보직을 삼성물산, 삼성전자, 제일제당 부사장 등 3개로 줄였다. 또 그룹 현안도 직접 챙기기 시작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아버지가 나보고 물러나라고 하시는구나"라며 당시 심정을 밝혔다.
이병철 창업주는 1976년 9월 삼성 차기 경영자로 셋째인 이건희 회장을 지목했다. 암수술을 위해 일본으로 출국하기 직전이었다.
이씨는 "아버지의 병이 암이라고 확인된 후 일본의 가지타니 박사의 집도를 받으러 가기 전날 밤 전 가족이 한자리에 다 모였다"며 "건희는 해외출장 중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어 "장소는 용인에 있는 아버지의 거처에서였다. 그 자리에서 아버지는 후계구도에 대해서 처음으로 언급했다"며 "'앞으로 삼성은 건희가 이끌어 가도록 하겠다'고 선언했다"고 덧붙였다.
이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1987년 이후 외국으로 떠났다. 동생이 삼성의 총수가 된 마당에 부담을 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후 5년여 동안 아프리카·남미·미국·일본 등 여러 나라를 다녔다. 가급적이면 한국은 잊고 살아가려 했다.
이씨는 현재 지병으로 투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