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삼국지 기행 28 후베이성편> 5-1. 촉의 기틀이자 패망의 서곡 - 형주고성

2012-02-06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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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주고성 정동문 앞.


(아주경제 배인선 기자) 형주고성(荊州古城) 성곽을 자동차로 한 바퀴 둘러본다. 골목 사이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학생들, 길가 상점 앞 탁자에서 마작을 두는 할아버지들, 떠들썩하게 수다를 떠는 중년 부인들. 과거 천하의 중심으로 불렸다는 역사의 고도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이 얼굴 곳곳에서 묻어나는 듯하다. 1800여년 전 유비군을 따라 정처 없이 방랑하던 백성들도 이곳에 입성해 보금자리를 틀었다. 그리고 10년 간 관우의 보살핌 속에 안락하고 편안한 생활을 누렸을 것이다. 관우가 손권의 부하 여몽의 치밀한 계략에 넘어가 형주성을 빼앗기기 직전까지……

형주로 들어오는 고속도로 톨게이트 관문.

훙후(紅湖)를 뒤로하고 취재팀은 자동차로 세 시간을 달려 과거 위 촉 오 삼국이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던 징저우(荊州)로 향했다. ‘중원의 배꼽’이라고도 불리는 이곳 징저우는 총 120회로 구성된 나관중의 삼국연의 중 무려 72회에서 등장하는 삼국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고도(古都) 중 하나다. ‘유비, 형주를 빌리다’ ‘관우, 형주를 잃다’ 등 고사가 벌어진 징저우는 삼국지 매니아라면 누구나 한 번쯤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은 삼국지의 주요 무대이기에 취재진의 마음은 설렜다.

징저우 시내로 들어서자 저 멀리 형주고성이 고풍스러운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한 눈에 봐도 1800여년의 역사의 위엄이 느껴질 정도로 장대하다.

1800여년의 역사를 가진 형주고성.징저우 시내를 들어서면 형주고성의 고풍스러운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천여 년간 무려 10차례 대규모 보수를 거쳐 지금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동서 3.75km, 남북1.2km, 면적 4.5㎢. 성벽 둘레 10.8km이라 성곽 주위를 차량으로 한 바퀴 둘러보는 데도 수십 여분이 걸리니 그 면적이 얼마나 거대한 지 짐작이 간다.

취재진 차량이 커다란 문 앞에 멈춰 섰다. 귀빈을 맞이한다는 뜻에서 이름 지어진 인빈문(寅賓門) 앞이다. 정동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정동문(正東門)이라고도 불린다.

성문에 오르니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청룡언월도다. 1800여년 전 관우가 전쟁터에서 한 번 휘두르면 적군이 우수수 말에서 떨어졌다는 바로 그 무게 82근(18kg, 한 근 286g, 한나라 기준) 짜리 전설 속의 무기다.

관우의 청룡언월도. 관우는 과거 10년간 형주성을 지켰다. 그래서 징저우 사람들의 관우 숭배는 대단하다.


안내원 왕옌(王滟)은 “형주성은 삼국시대 관우가 축조하고 10년 간 이곳을 굳건히 지켰다는 고사가 전해져 내려와 형주인들의 관우 숭배심이 비교적 강하다”며 청룡언월도가 형주성 정동문 앞에 위풍당당하게 꽂혀 있는 상징적 의미를 설명했다.

성곽 곳곳에 세워진 조운·위연·관흥 등 삼국시대 한 가닥 했던 영웅들의 조각상이 취재진을 반긴다. 마치 1800여년 전 창칼이 부딪히는 소리와 말발굽소리로 가득했던 전쟁터 한 가운데를 누비는 듯한 느낌이 든다.






정동문에는 2층짜리 누각이 하나 있다. 빈양루(賓陽樓)다. 1층에는 유비·제갈량·관우·장비·조자룡 동상이 모셔져 있다. 형주성을 기틀로 삼아 향후 강국을 건설하려는 이들 다섯 주인공의 강인한 의지가 뿜어져 나오는 듯 하다.

형주고성 정동문 빈양루 1층에 모셔놓은 (맨앞오른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유비 제갈량 조자룡 관우 장비상.


2층에는 장비·관우·조자룡의 입체 벽화와 함께 ‘충의는 영원하다’는 뜻의 ‘충의천추(忠義千秋)’ 네 글자가 쓰인 현판이 걸려있다. 1800여년 전 관우는 형주성을 빼앗기고 손권에 붙잡혔다. 항복을 권유하는 손권의 감언이설에도 불구하고 유비에 대한 충성심으로 항복을 거절한 관우의 강인한 충심이  느껴졌다.

형주고성 정동문 빈양루 2층에 있는 장비 관우 조자룡의 입체 벽화. 위에는 '충의는 영원하다'는 뜻의 '忠義千秋'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누각을 나와 성곽 위를 걸었다. 저 밖으로 넓이가 대략 20여m는 돼 보이는 해자가 흐르고 있다. 해자가 어찌나 넓은지 아침에 피어 오르는 물안개가 조용히 성곽을 감싸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해자가 성곽을 쭉 둘러싸고 있으니 그 길이가 족히 10km는 될 것이다.

안내원은 “형주고성은 가장 바깥의 해자, 중간의 벽돌성, 그리고 안쪽의 토성, 총 삼중 구조로 지어진 난공불락의 철옹성”이라고 설명했다.

과거 형주성에는 항상 외부의 침입이 끊이질 않았다. 1800여년 전 위 촉 오가 서로 차지하기 위해 피 튀기며 전투를 벌였던 병가필쟁지지(兵家必爭之地)가 아닌가. 그런데도 이곳 백성들이 관우가 관할하던 10년 간 외부의 침입 없이 마음 놓고 편히 생업에 종사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견고한 성곽과 함께 관우의 어진 통치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형주고성은 가장 바깥의 해자, 중간의 벽돌성, 그리고 안쪽의 토성, 총 삼중구조로 지어져 난공불락의 철옹성이라 불린다.


성곽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공안문(公安門)이 나온다. 공안문은 형주성에서 유일하게 수로로 연결 된 성문이다. 배를 타고 형주성에 입성하려면 반드시 공안문을 통해야 했기에 형주를 얻은 유비도, 형주를 빼앗은 육손도 바로 이곳 공안문을 통해 형주성에 입성했다. 참으로 사연이 깊은 성문이 아닌가 싶다.

형주고성 내 유일하게 수로로 연결된 공안문. 유비가 형주성을 차지할때도, 육손이 형주성을 빼앗을 때도 모두 공안문을 통해 입성했다.


1800여년 전 유비는 공안문을 통해 형주성에 입성하면서 그 동안 감내해야 했던 인내의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으리라.

과거 유비는 형제의 의리를 맺은 유표의 밑에서 ‘비육지탄’의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막상 유표가 형주성을 부탁했을 때는 사양했다. 명분이 있어야 백성이 따르고 백성이 따라야 나라를 세울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유표가 죽고 형주성은 결국 조조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유비는 조조군에게 쫓기는 갈 곳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자 손권과 손잡고 적벽대전을 성공으로 이끌고 우여곡절 끝에 손권으로부터 빌려오는 명목으로 형주성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후 유비는 형주성을 기틀로 삼아 한중을 점령하고 촉을 세움으로써 황제의 지위에 오른다.

형주성은 유비에게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오죽했으면 약속을 중히 여기는 유비가 손권으로부터 형주성을 빌려와 놓고도 손권의 수 차례 반환 요구를 이런저런 핑계로 묵살했을까. 이로 인해 중국에는 ‘남의 것을 빌리고 되돌려주지 않는다’는 뜻으로 ‘유비가 형주를 빌리다’는 속담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유비가 형주성을 잃은 것은 촉이 패망하는 서곡이 됐다. 자만했던 관우가 양양 번성을 점령하려고 형주성을 잠깐 비운 사이에 오나라는 치밀한 전략을 펼쳐 형주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형주성과 함께 사랑하는 아우 관우를 잃은 유비는 막내 동생 장비까지 허망하게 죽어버리자 결국 판단력까지 흐려진다. 그는 신하들의 조언도 무시한 채 무리하게 오나라 공격을 감행해 대패하고 결국 백제성에서 운명을 다했다.

‘전략적 요충지’인 형주성을 빼앗기고 관우 장비와 같은 훌륭한 인재를 한꺼번에 잃은 촉의 앞날에는 이때부터 이미 패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던 것이다.

**형주성 이모저모

형주성의 북문인 공극문.


형주성 북문인 대북문, 다른 말로 공극문(拱極門)이라고도 불린다. 성문 위에는 조종루(朝宗樓) 누각이 하나 있다. 이곳 누각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니 저 너머로 득승가(得勝街)가 보인다. 관우가 과거 번성 공략에 나섰을 당시 적장 방덕의 목을 베고 조조군을 전멸시킨 뒤 바로 이곳 득승가를 지나 형주성으로 귀환했다는 일화가 있다.

북문 밖으로 보이는 득승가. 관우가 과거 번성공략하고 개선할 당시 형주인들은 이곳에서 관우의 승전을 축하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당시 백성들은 이곳 거리로 몰려 나와 관우의 승리에 기뻐하며 풍악을 울리고 폭죽을 터뜨리며 관우를 맞이했다. 형주성문이 활짝 열리고 백성들의 환호 속에 병사들이 당당하게 행진하고 그 행렬의 중앙에는 적토마를 탄 관우가 위풍당당하게 백성들에게 손을 흔들었으리라.

그리고 대북문에서 동쪽으로 몇 미터 가면 관우가 당시 승리를 하고 돌아와 적토마를 씻겼다는 세마지(洗馬池)도 있다. 지금은 공사판으로 변해 흔적을 볼 수는 없어 아쉬움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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