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영화에 대한 재능도 있어서 '꽃피는 마을'(1970), '꽃파는 처녀'(1972) 등 4편의 대작영화 제작을 주도했고, 2007년 칸 영화제에 출품된 '한 여학생의 일기'도 그의 손을 거쳤다.
그는 1970년대 납북된 신상옥·최은희 부부에게 영화제작을 맡기고 이들에게 특별대우를 해 줄 정도로 영화발전에 관심이 많았다.
소장한 영화필름과 CD만 해도 중국영화자료관이 소장한 3만개의 절반인 1만5천개에 달할 정도로 엄청난 소장규모를 자랑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1973년 '영화예술론'이란 문예이론 저서를 펴내는 등 예술이론가로서 재능도 발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한 영화광이었다는 지적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다.
일각에서는 소비에트가 그랬듯이 김 위원장이 영화를 '선전 선동용'으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서대숙 교수가 쓴 '현대북한의 지도자'에 따르면 김정일은 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문화예술지도과에서 일하며 북한에 문화예술 혁명을 일으키는데 일조했다.
특히 그의 예술 작품에는 확고한 사회주의적 내용이 있고,이는 아버지 수령의 지위를 떠받드는 '선전 선동용'으로 그 가치를 발휘했으며, 중앙당 내에서 김정일의 지위를 확보하는 수단이 됐다는 것.
북한영화전문가인 이효인 경희대 연극영화과 교수는 "정치적으로 내세울 게 없었던 김정일은 문화예술에 몰두했다"면서 "김정일은 북한 체제를 유지하는데 문화를 이용했고, 개인적으로는 예술을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