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제릉에서 만난 관우 |
순제릉 입구, 남풍가를 연주하는 모습의 순제 석상. |
“중화민족 시조 순제는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자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는 성군(聖君)이었습니다.”
순제에 대한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능의 내부로 발길을 옮기자 뜻밖에도 여기와 별 인연이 닿지 않을 것 같은 관우 사당(關公祠)이 고즈넉한 모습으로 취재진을 맞았다.
순제릉 동쪽 끝에 자리잡은 관우사당. |
“관우가 악덕 토호를 죽이고 고향을 떠나기 전까지 해마다 이 곳을 찾아 순제의 덕을 기리는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순제를 찾은 관우를 기념해 세워진 관우사당. 황제 능에 관우 사당이라니, 놀라움과 반가움이 교차했다.
명(明)나라 만력(萬曆) 10년, '협천대제(協天大帝)'로 봉해진 이후 청(淸)대에 이르면서 관우에 대한 중국의 사랑은 극에 달했다. 관우의 고향이자 생가가 있는 윈청(運城)시를 찾는 황제의 발걸음도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청(淸)대 전역에 걸쳐 관우 사당만 30만여 개에 달했다고 하면 관우를 향한 중국인들의 시공을 초월한 존경심을 짐작할 수 있을까. 순제릉 관우 사당 또한 청나라 초기 지어져 2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관우 사당은 소년 관우가 타고 온 말을 매두었다던 회화나무 옆에 세워졌다.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잎이 무성한 고목 아래는 후대의 한 시인이 순제와 관우를 생각하며 남겼다던 시 한 구절이 남아있었다.
莫問古槐幾多年,關公曾把烈馬栓.不圖枝葉吐新芽,一杆擎起堯順天.
“나무의 나이를 묻지 마라. 관공의 말이 묶여있던 곳이니. 나뭇가지에 새 잎이 돋기를 바라지 않는다. 늘 그 자리에서 요순(요임금과 순제)의 하늘(덕)을 받쳐주기를 바랄 뿐.”
성군을 기억한 관우와 태평성대를 이룬 순제, 두 황제의 덕을 함께 기념하는 문구였다.
사당 안 가운데 초록색 옷을 입은 관우 상이 자리잡고 있다. 붉은 얼굴, 짙은 눈썹에 부리부리한 눈매, 우람한 체격. 불끈 쥔 주먹을 허벅지에 올려둔 채 앉아있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문턱을 뛰어 넘어 묶어둔 말을 타고 치달을 듯한 기세다. 좌우에는 맏아들 관평과 주창이 관우를 보위하고 있다.
해마다 음력 2월 2일이면 관우 기념 의식이 열린다. 무사(武士)로 분장한 인근마을 청년들이 사당의 관우상을 들어올리고 순제릉을 순회한 뒤 정전(正殿) 앞에 멈춰서 순제 제사를 지내고 다시 관우 사당에 안치한다.
백성을 아끼고 음악을 사랑한 순제와 충절의 무신(武神) 관우가 함께 있는 순제릉이 마치 두려울 것 없는 '이상향'처럼 느껴졌다. 세상을 호령한 명장 관우의 호위 속에서 무덤 속 순제는 더할나위없이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스쳐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