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정로] ‘스마트’ 시대에 보내는 ‘디지로그’ 선물

2011-02-25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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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형 한국 랜드스케이프 대표이사


PC와 노트북, 스마트폰 같은 디지털 기기가 발달하면서 언제부턴가 우리는 ‘쓰는 것’에 상당히 인색해졌다. 종이에 쓰는 것이 다소 번거롭고 수정도 어려울 뿐 아니라 왠지 시대에 뒤쳐져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문자를 디지털화해야만 이메일이나 휴대폰 문자 서비스를 통해 빠른 전달이 가능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만년필과 같은 필기구는 아날로그를 상징하는 대표적 품목으로서 외부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꾸준하게 사용되고는 있지만 이런 디지털 환경의 변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자가 몸담고 있는 필기구 업계 역시 끊임없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달 독일에서 열린 필기구 박람회는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려는 세계 펜 업계의 뼈를 깎는 노력의 면모를 엿보기에 충분했다. 우주공간이나 수중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공기압으로 잉크량을 조절하는 첨단 기술을 적용한 펜에서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를 모티브로 개발해 스토리 콘텐츠를 담은 제품에 이르기까지 펜의 다양한 변화를 지켜볼 수 있었다.

사실 펜은 단순히 ‘쓰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역사문명적 관점에서 볼 때 글씨는 사람을 이해하는 도구이자 문명을 이해하는 기록의 도구였다. ‘쓰기’가 곧 역사의 출발이요 인간을 이해하는 사회적, 감성적 행위인 것이다. 오늘날에도 잘 길들여진 펜은 나만의 스타일과 개성을 표출하는 도구일 뿐 아니라 고민과 정성을 담은 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수행하는 중요한 도구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급속한 기술의 발전 속에서도 ‘쓰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컴퓨터 활자에는 없는 육필(肉筆)이 가진 인간적인 감성과 시각적인 개성을 표현할 수 있다는 장점은 스마트 시대에도 그 빛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많이 훼손돼 책상 구석에 자리하고 있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때 어머니께 선물로 받은 만년필이 떠오른다.

어머니께서는 당시 만년필 가격에 맞먹는 웃돈을 더 주시고 그 위에 짧은 글귀를 새겨오셨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내 손에 만년필을 쥐어주시며 “큰 성공을 거둬 자만에 빠졌을 때나 실패로 낙심했을 때 이 글을 보면서 마음을 다스려라”라고 당부하셨다. 그 짧은 글은 ‘이것 역시 곧 지나가리라’ 였다. 호기심이 많아 이런저런 일을 벌이기 좋아했던 나를 위한 어머님의 통찰력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어머니께서 주신 그 만년필로 이런 저런 서류와 편지를 정성껏 써 내려가면서 어머니의 메시지를 되뇌였고 이런 과정에서 그 만년필은 단순한 펜을 넘어 내 젊은 시절 성공과 실패의 순간을 함께 한 파트너가 되었다.

이메일과 스마트폰이 정성들여 쓴 편지를 대체하고, 인간적 정이 느껴지는 쪽지 보다 140자로 써 보내는 트위터가 인기를 얻는 최첨단 디지털 시대에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과거의 향수가 담긴 레트로(Retro) 제품이 봇물을 이루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 때보다 변화와 혁신, 속도가 요구되는 시대이지만 그 변화와 혁신의 목적은 바로 ‘사람’ 그 자체이기 때문임을 대중이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요즘 들어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펜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늘고 있다. 필기구 업계의 시대를 반영한 노력으로 젊고, 컬러풀하고, 감각적인 디자인이 적용된 다양한 펜들이 시장에 나오면서 젊은 층에게 또 하나의 ‘소품’ 아이템으로 소구한 측면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젊은이들이 ‘쓰는 맛’과 ‘쓰는 멋’을 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수많은 젊은이들이 졸업을 하고 사회로 쏟아져 나온다. 냉혹한 경쟁과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이들이 겪게 될 수 많은 역경과 좌절,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고 얻게 될 보람과 영광이 눈에 선하다. 이 젊은이들에게 펜이 단순히 쓰는 도구를 넘어 용기와 개성의 원천이자 깊은 메시지를 담을 수 있는 중요한 파트너가 됐으면 한다. 내 어머니가 선물해 준 만년필이 내 인생의 파트너가 되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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