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시리즈 17] 이건희의 유년시절

2010-02-19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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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삼성 전 회장의 개인사는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현재도 그와 관련한 개인적인 정보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베일에 쌓여있다.
 
하지만 이건희가 삼성에 첫발을 들이기 이전의 모습은 그의 성격과 경영 스타일 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한다. 어찌 보면 다소 우울하기까지 한 그의 유년과 학창시절은 오히려 삼성을 이끄는 지도자로서 덕목을 쌓을 수 있는 자양분이 됐다.
 
이건희는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젖을 떼자마자 본가인 의령에 내려가 친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그리고 유치원에 다닐 무렵 다시 대구로 왔다. 그 또래 어린 아이들이 그렇듯 할머니 품에서 자란 이건희는 낯선 부모와 형제들 사이에서 혼돈을 겪었다.
 
대구에 온지 얼마 안 돼 호암의 사업 확장으로 이건희는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했다. 그나마 몇 년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부산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1953년에는 열두살의 어린 나이에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간다.
 
이건희는 유년시절 끊임없이 바뀌는 환경에 적응하기에도 벅찼다. 특히 일본 생활은 소년 이건희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환경이었다. 식민지였던 후진국 출신 소년이 일본 또래들과 친분을 쌓는 것도 쉽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홀로 사색하는 것을 즐겼다. 영화감상도 이때 생긴 취미활동이다. 그의 영화감상 방법은 상당히 독특하다. 이건희는 영화를 감상할 때 주인공 뿐 아니라 조연의 입장에서 영화를 감상하고는 했다. 아울러 감독·카메라맨의 자리까지 두루 생각했다.
 
이와 관련해 그는 자신의 에시이집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를 통해 “(영화를) 여러 각도에서 보면 작은 세계를 만나게 된다...그것이 습관으로 굳어지면 입체적으로 생각하는 ‘사고의 틀’이 만들어진다...일할 때에도 새로운 차원에 눈을 뜨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친구가 부족했던 이건희는 반려견을 키우며 정을 나눴다. 그리고 그의 애견생활은 향후 삼성의 사회환원활동으로 이어진다. 삼성화재는 안내견학교를 설립해 시각장애인들의 손과 발이 되는 안내견을 공급하고 있다. 과거 국제적으로 품종인정을 받지 못한 진돗개가 공식 등록된 것도 진돗개 복원을 위한 그의 노력에서 비롯됐다.
 
전자제품을 직접 분해하고 조립하는 취미도 당시의 외롭던 생활에서 비롯됐다. 전자제품의 작동 원리를 이해한 그는 삼성 회장에 있으면서 기술적으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문제해결을 유도한다. 대표적 사례로 삼성 휴대폰 ‘T-100'을 들 수 있다. 국내 최초 텐밀리언셀러(1000만대 판매)에 등극한 T100 휴대폰은 별명인 ‘이건희폰’으로 잘 알려졌다. 이건희는 이 제품의 기능은 물론 크기, 버튼 위치까지 관여했다.
 
이후 서울사범대학교 부속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건희는 다시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선친인 호암이 잠시 몸을 담았던 와세다 대학에 입학한 것. 와세다는 게이오 대학과 함께 일본의 양대 사학으로 불린다. 

와세다 시절 이건희의 성적은 알 수 없다. 다만 그 자신이 공부에 취미가 없었다고 회고한 것으로 미루어 우수한 학생은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대신 그는 일본의 정재계 인사들의 등용문인 와세대 대학을 졸업함으로써 풍부한 인맥을 쌓고 이를 경영에 활용한다.
 
와세대 대학을 졸업한 이건희는 미국 조지워싱턴 경영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한다. 부전공으로는 매스컴학을 택했다.
 
매스컴 공부를 통해 그는 커뮤니케이션과 미디어에 대한 이해를 키웠다. 그리고 이는 삼성 회장 재직 당시 중요한 고비마다 활용됐다.
 
회장 취임 직후인 1988 3월 이건희는 ‘제2창업’ 선언에서 1994년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모두 바꾸라”는 말로 유명한 ‘프랑크푸르트 선언’에 이르기 까지 사내외에 결정적인 의사를 전달하고자 할 때 가장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채용했다.
 
사내 커뮤니케이션 속도를 높이기 위한 사내 통신망인 ‘마이 싱글’도 그의 작품이다. 이를 통해 삼성은 ‘회장의 지시가 12시간 안에 과장급까지 전달되고 현장의 소리가 하루 안에 회장까지 전달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는 대언론 정책까지 이어진다. LG그룹의 한 임원은 익명을 전제로 “삼성의 홍보 역량은 매우 뛰어나다”며 “지난 2007년 태안에서 기름이 유출한 사고도 ‘태안사건’이라고 불리는데 사건 이름에 삼성중공업의 명칭을 붙이는 것이 보통”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그룹 위기의 순간마다 적절한 시기에 관련한 대응이 적절히 나오는 것 역시 삼성이 국가를 대표하는 기업으로 인정받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아주경제= 특별취재팀 ehn@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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