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의 밑그림은 없고 산소 호흡기만 들이대고 있다"
국내외 경기 침체의 파도가 몰아치면서 기업과 금융기관의 부실 가능성이 커지고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부도 공포가 확산되고 있지만 신속한 구조조정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정부는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금융권과 기업에 133조 원에 이르는 자금 지원 방안을 내놓았지만 명확한 구조조정의 청사진은 제시하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구조조정이 뒷전으로 밀려 부실 정리가 지연되면 환부가 커져 큰 사회.경제적 비용을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1997년 기아차가 부실로 위기에 몰렸을 때 정치권 일각에서 국민기업으로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정부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시간과 비용만 낭비하고 결국 환란의 실마리를 제공한 아픔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 구조조정 지연..지원에 치중
정부와 금융당국은 기업 지원과 구조조정을 병행한다는 입장이지만 옥석 가리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정부로서는 환란 때처럼 기업들이 줄줄이 무너지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정부가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먼저 채권은행 중심의 기업 구조조정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지만 아직 별다른 진척을 못보고 있다.
우리 경제의 가장 큰 불안 요인으로 떠오른 건설업종이 대표적이다. 건설사의 부실이 커지고 있지만 정부는 은행권에 공을 넘겼고 은행들은 갈팡질팡하고 있으며 기업들은 눈치만 보고 있다.
은행권은 애초 100대 건설사를 대상으로 지난 17일까지 대주단(채권단) 협약 가입을 유도하다가 이를 23일로 연장하고 또다시 시한을 없애면서 가입 대상에도 제한을 두지 않기로 했다. 채권단의 자금 지원을 받는 건설사는 그에 상응하는 자구노력을 해야 하는데 "경영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정부는 `중소기업 신속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주채권은행이 중소기업을 A등급(정상기업), B등급(일시적 경영난에 직면한 기업), C등급(부실 징후가 있으나 회생 가능한 기업), D등급(회생 불가 기업)으로 분류하기로 했으나 A와 B등급 기업에 대한 자금 지원에 집중돼 있고 C와 D등급의 처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조선업종도 중소형사의 구조조정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으나 정부는 "중견 이상의 조선사는 큰 문제가 없다", "일시적 유동성 문제를 겪는 중소형사는 신속 지원 프로그램을 적용하겠다"고 밝혔을 뿐이다. 이를 비롯한 정부의 각종 대책이 중소기업 대출과 보증 확대, 채권시장안정펀드 조성 등 지원 쪽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이다.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구조조정의 원칙과 기준을 제시하고 은행들은 거래 기업의 재무.영업상태, 신용도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살 수 있는 기업과 그렇지 않을 기업을 골라내야 하는데 아직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평가다.
은행들은 연말 결산을 맞아 건전성 지표인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을 높여야 하는데 부실기업을 정리하면 당장 건전성이 나빠질 수 있고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중소기업 대출을 독려하자 구조조정에는 소극적인 태도다.
◇ 부실확대 우려.."환부 도려내야"
경기 불황의 골이 깊어지는 상황에서 한계기업이 연명하면 금융권의 대출 부실이 커지고 이는 신용경색을 심화시켜 회생 가능한 기업에도 자금이 제대로 돌지 않아 실물경제가 더욱 나빠지는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경희대 권영준 교수는 "경기 침체와 디플레이션 상황에서 한계기업은 살 수 없고 주변 우량 기업도 신용경색으로 쓰러질 수 있다"며 "따라서 암 부위를 도려내야 다른 곳으로 전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정부와 금융당국은 구조조정의 원칙과 기준을 제시해 옥석을 구분하고 환부를 없애는 선제 조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화증권은 2009년 은행업종 전망 보고서에서 내년 1분기부터 산업별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가동되고 경기가 같은 해 2분기를 저점으로 소폭 반등하는 것을 가정할 때 상장 은행들의 신규 부실 채권이 32조 원가량 발생할 것으로 추정했다.
경기가 내년 1분기를 저점으로 회복하고 구조조정이 조기에 성공하면 신규 부실 채권이 17조6천억 원으로 줄겠지만 경기 회복이 늦어지고 구조조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때는 69조8천억 원으로 급증하고 은행들이 영업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한화증권 박정현 수석연구위원은 "정부의 정책 목표가 기업 구조조정보다는 생존을 위한 유동성 지원에 집중돼 있어 자칫 이 과정에서 은행의 건전성이 더욱 악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우량 업체와 부실 업체를 구분해 철저한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성대 김상조 교수는 "정부는 문제가 되는 업종들의 경영과 재무 실태를 공개하고 지원할 곳은 지원하면서 구조조정도 해야 신뢰를 얻을 수 있다"며 "구조조정을 늦출수록 부실이 커지고 다른 산업으로 확대된다"고 말했다.
◇ "환란때 기아차 교훈 되새겨야"
1997년 7월 재계 서열 8위인 기아그룹의 몰락은 한국 경제에 큰 충격을 줬다. 그 중심에 선 것이 기아차였다.
채권단은 기아차에 부도유예협약을 적용했다. 이 협약은 회생 불능이라는 최종 판정 전까지 금융권이 자금을 회수하지 않는 것으로, 결과적으로 부실 기업의 처리를 지연시킨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당시 기아차 경영진과 정치권, 사회 일각에서는 국민기업인 기아차를 살려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정부는 시장 불개입 원칙을 내세웠다. 기아차를 제3자에게 매각하지 말고 공기업화해야 한다는 요구까지 나왔다.
기아차 사태가 해법을 찾지 못해 장기화하면서 우리나라의 대외 신인도가 하락하며 해외 차입 여건이 나빠지고 환율과 증시가 불안에 빠지는 등 경제의 불확실성을 가중시켰고 결국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처지가 됐다.
1998년 12월 현대차가 기아차를 인수하는 것으로 마무리됐지만 한국 경제는 큰 대가를 치뤘다. 경희대 권영준 교수는 "기아차 처리 문제에 정치논리가 작용하면서 시간을 끌었고 사태가 악화됐다"고 말했다. 당시 정부 또한 제역할을 못한 것으로, 이런 사태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