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기고] 대형 유통업체의 경영간섭 금지, 상생 위한 가이드라인 되기를

2023-08-08 05:00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사진=공정거래위원회]

온라인몰을 운영하고 있는 A사는 온라인 최저가 판매제도를 도입해 소비자들로부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공정한 경쟁과는 거리가 먼 측면이 있었다. A사는 자사 판매상품을 최저가로 유지하기 위해 자사의 비용을 줄이는 등 효율성을 높이는 대신 입점업체들로 하여금 경쟁 온라인몰에서의 판매가격을 높이도록 요구했고 입점업체들이 요구사항을 수용하지 않으면 자신의 사이트에서 해당 입점업체의 상품이 검색되지 않도록 시스템을 변경하는 방식 등으로 자신의 요구를 사실상 강제했다. 자신들의 이윤 극대화를 위해 입점업체의 가장 기본적인 경영 활동인 가격책정에 간섭한 것이다.
 
A사의 사례는 가상이 아니라 온라인 매출액 1위인 어느 대형 유통업체와 입점업체들 사이에서 실제 발생한 일이다. 입점업체 입장에서는 이 대형 유통업체가 매우 중요한 거래 상대방이기 때문에 이 대형 유통업체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아 자칫 거래가 단절되는 경우에는 유사한 대체 거래선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21년 이 대형 유통업체의 행위를 공정거래법 위반으로 보고 과징금을 부과하는 한편 시정명령을 내렸다.
 
대형 유통업체가 자신의 우월한 거래상 지위를 이용해 입점업체들의 경영 활동에 간섭하는 일은 비단 온라인 유통시장에만 발생한 것이 아니다. 과거 B 백화점은 입점업체들을 통해 경쟁사 매출정보를 제공 받아 경쟁사 대비 자신의 매출 비중을 산출하고, 매출 비중이 저하되는 입점업체에 대해서는 초특가행사, 고객 초대회와 같은 판촉행사를 강요한 사례도 있었다. 판촉행사 등의 실시 여부는 입점업체가 경영상 필요에 의해 자유롭게 결정할 사항인데 대형 유통업체가 이를 사실상 강요한 것이다.
 
이처럼 대형 유통업체가 입점업체들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침해하는 경우 양자 간 공정거래의 기반이 저해되는 것은 물론이고, 궁극적으로는 유통시장 전반에서의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도 제한된다. 공정거래법은 이러한 행위들을 거래상 지위를 이용한 경영 간섭으로 규정하고 엄격히 금지해오고 있다. 그런데 정작 이러한 행위가 발생할 가능성이 큰 유통 분야를 관할하는 대규모유통업법에는 이러한 행위가 명시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물론 공정거래법을 통해 대형 유통업체들의 이러한 행위를 규율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하다. 그러나 대형 유통업체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우선 적용 받는 대규모유통업법에 관련 규정이 없어 입점업체에 대한 경영 간섭이 위법하다는 인식을 갖추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공정위는 대규모유통업법에도 경영 간섭 금지조항을 신설하고자 입법적 노력을 기울였고 지난 7월 18일 마침내 대규모유통업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번 대규모유통업법 개정은 경영 간섭에 노출된 입점업체들에 대한 보호를 한층 강화한다는 측면에서도 의의가 있으나 더 나아가 대형 유통업체와 입점업체 간 상생이 활성화될 수 있는 기반 마련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유통시장에서 진정한 상생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대형 유통업체와 입점업체가 판매전략, 가격구조 등을 협의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보장하는 환경이 전제돼야 한다.

입점업체가 대형 유통업체의 의사결정에 종속된다면 대형 유통업체가 마련한 상생 방안들은 퇴색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유통시장에서의 상생은 대형 유통업체가 입점업체 고유의 결정을 최대한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번 대규모유통업법 개정은 대형 유통업체에게 입점업체의 경영을 존중하면서도 이들과의 실질적인 상생을 추구할 수 있는 이정표의 역할, 하나의 '상생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의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는 말이 있다. 입점업체의 매출이 곧 대형 유통업체의 매출로 이어지는 유통구조 하에서 입점업체의 매출 부진은 곧 대형 유통업체의 위기로 다가올 것이다. 같은 배를 타고 있는 대형 유통업체와 입점업체들이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기반으로 상생을 통해 함께 성장해나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