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속 중국] ②조선족의 새로운 고향 대림동, 삶을 가꾸고 공존을 고민하다

2020-01-28 08:36
대림동서 '요람부터 무덤까지'...조선족·중국인의 최대 생활 터전
공존의 화두, "함께 살기 위해 어른들이 먼저 시간과 노력을 쏟아야"

[편집자주] 최근 우리 사회는 이방인 이웃들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다. 1~2년 사이 이들을 관찰하는 TV 예능 프로그램이 인기를 끈 탓이다. 갓난아이부터 장인·장모님까지, 미디어 속 이방인 이웃들의 친숙한 모습에 안방 속 한국인들은 울고 웃는다. 미디어 밖 이들은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방인 이웃 중에서도 중국인들은 일상 속에서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다. 지난해 11월 기준 우리나라에 장기체류하는 외국인의 64%가 중국계(조선족·중국·대만·홍콩)다. 무려 112만8490명이다. 우리나라에 공식적인 차이나타운은 인천과 부산, 두 곳밖에 없지만, 이들이 일상을 꾸려가는 ‘진짜’ 차이나타운은 이제 각 지역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아주경제신문 기획취재팀은 지난해 12월 말부터 약 한 달에 걸쳐 대림동과 연남동, 명동, 대학가 등을 방문해 이들 삶의 궤적을 쫓았다. 본지는 이들을 만나며 △139년 전 뿌리를 내리고 우리 근현대의 굴곡을 함께 해온 구화교 △오랜 동포이자 새로운 이방인인 조선족 등 신화교 △한·중 미래 관계의 가교가 될 중국인 유학생 등 3色의 중국인 이웃을 찾았다. 본지가 엿본 이들 삶의 모습과 고민을 하나씩 풀어가 보려고 한다.


#. 중국인 장 모씨(26)는 "평소 대림을 자주 찾진 않는데 함께 생활 중인 친구가 끌고 왔다"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지난달 26일 서울 영등포구 대림2동 대림중앙시장 초입에서 만난 중국 동북 지역 텐진에서 온 5년 차 유학생이다. 그는 "워낙 복잡하고 시끄러운 곳이라 요즘 한국에 사는 제 또래의 중국인들은 생각보다 대림을 좋아하진 않는다"며 "저도 나중에 한국에 정착한다면 대림동 주변에 살 생각은 없다"고 덧붙였다. 막상 시장에 들어서 고향의 냄새와 풍경, 소리가 들려오자 장 씨의 표정은 이내 밝아졌다. 시장을 구경하던 장 씨의 손엔 어느새 검은 봉지 하나가 들려있었다. 이날 집에서 먹을 저녁거리라고 했다.
 

지난달 26일 서울 영등포구 대림중앙시장 초입길. 원색 위주의 간체 한자 간판들이 빛나고 있다.[사진=전환욱 기자]


대림중앙시장 골목통은 한국 속 차이나 타운이라기 보다는 한국인이 많이 오는 중국권 여행지 같았다. 대림동은 영화나 미디어에서 흔히 묘사하던 ‘무법천지’가 아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람 발길이 끊이지 않는 ‘별천지’였다.

서울지하철 2·7호선 '대림역' 12번 출구를 나와 시장까지 이어지는 골목에는 눈 돌리는 곳마다 빼곡히 간판이 들어서 있었고, 간판들엔 원색 위주의 간체 한자가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대림역을 빠져나오며 들었던 지하철 안내방송이 대림 골목통을 취재하며 가장 마지막으로 들었던 가장 유창한 한국어였다. 중국어 음악이 흐르는 시장 곳곳 스피커에서는 유창한 중국어로 각종 광고가 나왔지만, 뒤이은 한국어는 어딘가 어눌하고 어색했다.
 

지난달 26일 서울지하철 2·7호선 '대림역' 12번 출구 모습과 서울 영등포구 대림중앙시장 초입길.[사진=최지현 기자]


◆조선족, 韓 체류 외국인의 40%...그들의 '제2의 고향', 대림동

조선족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흔히 만나는 외국인 이웃이다. 정부의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월보'에 따르면, 작년 11월 기준 우리나라에 장기체류하는 조선족은 70만8885명으로 전체 외국인(174만5697명)의 40.6%를 차지하는 절대다수다. 단기 체류자, 다문화 귀화자까지 포함한다면 이 숫자는 더욱 커진다.
 

2019년 11월 기준 국가별 장기체류 외국인 현황.[자료=법무부]


2018년 기준 서울에는 18만3148명의 조선족과 6만8386명의 중국인, 6157명의 대만인이 살고 있지만, 공식 차이나타운은 없다. 대림동은 그런 서울에서 조선족을 중심으로 중국인들이 하나둘 자연스레 모여 형성한 ‘제2의 고향’이다. 타국 생활에서 겹겹이 쌓인 무장을 자연스레 해제하는 공간,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찾는 곳이다.

이들은 2000년대 초반부터 대림중앙시장을 중심으로 삶을 일궈왔다. '대림동 사람의 80%는 조선족'이라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2019 영등포구 통계연보'에 따르면 서울 영등포구 내 등록 외국인 3만5822명 중 2만5251명(70.5%)이 대림1~3동에 살고 있다. 특히 대림2동과 3동은 외국인 비율이 각각 42.5%(9453명), 41%(1만2093명)에 달한다. 외국인 대부분은 조선족 등 중국인이다.

한국 국적 주민들조차 80% 이상이 우리나라로 귀화한 중국계라는 얘기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비등록 외국인과 출·퇴근 근로자, 방문 유동인구까지 고려한다면, 실제 대림동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의 대부분이 조선족 등 중국인들일 것이다.
 

대림중앙시장 지도.[자료=대림중앙 문화관광형 시장 사업단]


◆가리봉동에서 대림동으로, 싼 집 따라 흘러온 이들
 

지난 3일 서울 영등포구 대림중앙시장에서 만난 조선족 이주자 1세대인 조상순·최재열 부부. 가게에서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하고 있다.[사진=최지현]


이들은 어떻게 대림동에 모이게 됐을까. 지난 1996년 우리나라에 들어온 조선족 이주자 1세대인 조상순·최재열 부부에게서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최 씨는 "예전에는 자식 키워서 대림동하고 가리봉동 구로로 보내지 말라는 말이 있었다"며 운을 뗐다. 그만큼 대림동은 환경이 안 좋았다는 것이다. 자연히 임대료도 저렴했다.

최 씨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시절 16살에 경상북도 점촌에서 만주로 이주했다. 아버지가 정착한 중국 지린성 메이허커우시(길림성 매하구시)에서 농사를 짓던 부부는 한국으로 왔다. 조 씨가 39살, 최 씨는 40살 때 일이었다. 그들은 이제 63세, 64세의 노인이 됐다.

입국하며 진 4000만원의 빚을 갚기 위해 공사 현장과 식당 일을 닥치는 대로 했던 부부는 2000년 최 씨가 현장에서 허리를 다치며 생계가 막막해졌다. 귀향을 고민하던 부부의 눈에 보인 것은 대림중앙시장에 있던 중국 식품점이었다. 부부는 2001년 대여섯 가지 한약 재료를 넣고 닭을 삶은 중국 산둥 지방 음식인 '더저우 파지' 가게를 냈다.

최 씨는 "처음 1년 동안은 하루에 2000원도 못 팔 만큼 죽을 쒔다. 보다 못한 건물 주인이 저녁 퇴근길에 몇 번이나 남은 닭을 모두 사서 동네에 돌렸지만, 한국 사람들 입맛에 낯설어 거의 먹지도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2년째인 2002년쯤부터 대림동에 조선족 동포 수가 늘면서 장사가 자리 잡았다"며 "이제는 조선족 모임 때 우리집 닭을 사 가지 않으면 혼이 날 정도"라고 한다.
 

지난 3일 서울 영등포구 대림중앙시장 내 조상순·최재열 부부의 '더저우 파지' 가게.[사진=최지현 기자]


대림동은 2004년경 즈음부터 '동포타운', '중국인 거리'라고 불리기 시작한다. 90년대 말 대림동 이전 최대 조선족 집거지는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이었다. 구로공단과 건설 인력 시장 등으로 일거리가 풍부하고 노동자를 위한 저렴한 가격의 단기 임대주택이 많았기 때문이다.

2003년 일명 '가리봉 뉴타운' 재개발 지정과 맞물려 집값이 상승하고, 2002~2003년 사이 정부의 '불법체류자 종합 방지 대책'과 '외국인 고용 허가제'로 조선족들이 모여 살던 가리봉동에 대한 불법체류 단속이 심해졌다.

이 여파에 가리봉동 조선족들은 인근 대림동·신림동·신대방동 등으로 흩어진다. 그중에서도 보증금 100만원·월 25만원, 보증금 500만원·월 15만원의 옥탑방과 반지하 등 집값이 저렴했던 대림동에 가장 많이 몰렸다.

고향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식당뿐 아니라 인력 시장, 친척 초청·비자·외국인 등록증 대행 등의 업무를 맡아주는 여행사, 중국 방식의 결혼식·돌잔치·칠순 잔치를 하는 근년 연변 웨딩홀·보성연 웨딩홀 등의 행사장, 중국식 장례식장까지 들어서며, 대림동은 중국계 이주민들의 새로운 생활 터전으로 자리 잡는다.

최 씨는 "조선족뿐 아니라 한족들도 친구나 친척을 따라 들어왔다가 집값과 물가가 싸고 중국인으로서 살기 편하기에 결국 눌러앉은 사람들이 부지기수"라고 설명했다.
 

지난달 26일 서울 영등포구 대림중앙시장 모습. 시장 끝자락에 있던 마작 물품을 취급하는 '마작관'이 눈을 사로잡는다.[사진=최지현 기자]


◆새로운 화두 '공존', 국적 아닌 '사람과 사람'의 만남으로
 

지난 4일 서울 양천구 신정동에서 만난 3세대 조선족 이주민인 홍세화 씨.[사진=전환욱 기자]


지난 2008년 중국 지린성 지린시(길림성 길림시)에서 한국으로 온 3세대 조선족 이주민인 홍세화 씨는 대림중앙시장 내 유명 맛집인 '린공즈멘관'을 운영한다. 평소 호탕하고 두려움 없는 성격의 홍 씨는 작년 영국에서 일어난 밀입국 이민자들의 냉동 컨테이너 집단 사망 사건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고 가슴이 철컹했다. 사건 발생 초기 사망자가 중국인으로 알려지자 중국인을 비하하는 악성 댓글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국적을 떠나 사람이 죽은 일에 그런 반응이 나온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며 "저나 조선족을 향한 말이 아니라도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자꾸 화가 치밀어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다"고 말했다.

홍 씨는 "이방인 딱지는 뗄 수 없다"며 "자라온 문화와 환경이 다르기에 거리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국적을 넘어서 서로 정이 들면 인간으로서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게 된다"며 "한국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자꾸 접촉하고 같이 열심히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이웃이 된다"고 덧붙였다.

최근 홍 씨는 서울 양천구 신정동에 새 가게를 내는 도전을 했다. 9살, 6살이 된 두 자녀가 조선족 사회뿐 아니라 한국인 사회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들의 국적은 중국인 조선족이지만, 한국에서 나고 자랐다.

그는 "12년쯤 되니까 부모인 우리도 정체성을 잘 모르겠는데 아이들은 더 할 것”이라며 "성인이 됐을 때 한국에서 살지, 중국에서 살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아이들의 선택권을 넓혀주고 싶다"고 말했다.

홍 씨는 "이제 조선족들도 예전처럼 한 지역에 자기들끼리 모여 살 수만은 없다"며 "사람이 친해지려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듯이, 한국인·조선족·중국인 어른들이 먼저 함께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아이들은 역사나 문화적 배경을 모르기 때문에 어른을 보고 배운다"고 덧붙였다.
 

홍세화 씨가 운영 중인 식당. 왼쪽은 대림중앙시장 내 린궁즈멘관, 오른쪽은 최근 새로 연 서울 양천구 신정동 린궁즈.[사진=최지현 기자]


홍 씨와 같이 3~4세대 조선족들 사이에는 한국에서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공존'의 문제가 뜨거운 화두로 떠올랐다. 1~2세대 조선족 역시 성인 자녀들의 한국 정착으로 중국 내 집과 땅을 완전히 처분하고 귀화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양꼬치·칭따오 맥주와 같이 우리 사회가 중국 문화에 익숙해지면서, 대림동 이후 신흥 조선족 집거지인 서울 광진구 자양동 양꼬치 거리는 한국인이 주요 방문객이다. 조선족 사회도, 우리 사회도 특정 지역을 두고 분리돼 살 수 없는 환경이 펼쳐진 것이다.

이런 변화를 두고 대림중앙시장에서는 우리 사회 속 조선족 사회의 역할을 고민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림중앙시장 상인회'와 '대림중앙 문화관광형 시장 사업단'이 함께 앞장섰다.

박진봉 대림중앙 문화관광형 시장 사업단장은 "대림동 조선족들은 과거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모였던 한인 이민자 1~2세대의 모습과 유사하다"며 "그동안은 먹고사는 데 급급했다면 이제는 문화와 복지를 생각해볼 때다. 대림도 삶을 가꿔야 할 때가 온 것"이라고 말했다.

매월 셋째 주 목요일 정기 모임에서 대림동 주민들과 상인들은 속 깊은 고민을 털어놓고 해결책을 논의한다. 지난해 이들은 시장 환경정비부터 시작해 중국차와 커피를 접목한 특화상품을 개발하고, 이주민들의 정착기를 온라인 콘텐츠와 매장 간판을 통해 알리고 있다. 지난 10월 중국 문화를 특화해 기획·개최한 '차이나는 대림문화축제'도 호평을 받았다.

박 단장은 "문화관광형 시장 사업을 통해 과거 선거는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조선족 주민들이 올해 총선에는 부쩍 관심을 가질 만큼 우리 사회의 일원이 돼가고 있다"며 "우리 사회가 조선족 주민들의 변화에 따뜻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준다면 좋겠다"고 밝혔다.
 

대림중앙시장 홈페이지에는 조선족 등 상인들의 정착기를 온라인 콘텐츠로 소개하고 있다.[자료=대림중앙 문화관광형 시장 사업단]

지난 10월 서울 영등포구 대림중앙시장에서 열린 '차이나는 대림 문화 축제'.[사진=대림중앙 문화관광형 시장 사업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