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목 칼럼] 디지털 문해력 시대…타이핑도 실력이다
2025-01-05 15:08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중국 당나라 시대 관리를 선발하던 네 가지 기준이다. 말 그대로 ‘신’은 신체와 용모에 대한 것이고, 요즘 말로 몸짱, 얼짱을 가리키는 것일 게다. ‘언’이라 함은 언변, 말솜씨와 화법이다. ‘서’는 글씨로 글재주와 필력이다. ‘판’은 그 사람의 지적인 판단능력을 가리킨다. ‘신’ ‘언’ ‘판’은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 같은데, 요즘에 이르러 가장 큰 변화를 겪는 것은 ‘서’일 듯싶다. 과거 학원가나 시내를 걷다 보면 자주 부기, 차트 글씨 학원을 보게 된다. 부기는 과거 상업고등학교에서 공부하던 상업부기, 공업부기이다. 차트는 주로 군대나 회사에서 업무보고를 위해서 상황판에 쓰는 특유의 글씨인데, 차트 글씨뿐만 아니라 펜글씨 등을 가르치는 학원도 있었다. 정보화와 전산화로 부기는 전산회계로 바뀌었고 차트 글씨는 프린터로 대체되면서 손 글씨의 중요성은 떨어졌다.
이전에 우리나라 대통령을 비롯한 유력 정치인들은 붓글씨로 휘호를 남기거나 신년 인사를 전했다. 그러나 요즘에는 이렇게 자신의 붓글씨 솜씨를 뽐내는 일은 좀처럼 없다. 정치인이나 유명 인사들이 국립묘지나 행사장에 방문해서 방명록에 남기는 글을 보자면, 그 내용을 떠나 글씨체가 어린이 필체라서 실소를 머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제 글씨를 좀 못 쓴다고 해서 그렇게 과거처럼 모자라는 사람으로 보지는 않는다. 모두 다 시대가 변한 탓이다. 그리고 컴퓨터를 사용하고 손 글씨를 쓸 일이 별로 없으니 자연히 글씨체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극장 간판도 마찬가지이다. 1960~1980년대에는 극장마다 영화간판을 손으로 그리던 화가들이 있었다. 그러다 대형 프린터와 디지털 혁명으로 대형 사진 출력이 가능해지면서 전국적으로 많은 극장들이 손 그림을 필요로 하지 않아 극장 화가들은 할 일이 없으니 자취를 감추었다. 워드프로세서나 프린터에 밀리는 손 글씨도 마찬가지의 운명인 것이다.
손 글씨의 대체는 타이핑이다. 타이핑은 디지털 리터러시의 한 방법이다. 물론 디지털 리터러시에는 단순한 표현방식인 타이핑뿐만 아니라 디지털을 읽고 분석하고 이해하고 정리하는 과정도 있지만 정보화 시대에 있어 주어진 시간 내에 디지털화하는 능력도 필요한 것이다. 디지털화로 인하여 각종 시험과 평가 방식에 있어 손 글씨에서 타이핑으로 큰 변화가 진행 중이다. 특히 각종 온라인 플랫폼과 전자문서가 보편화되면서 손 글씨의 중요성은 점차 감소하고 타이핑으로 서술형 답안을 입력하는 온라인 시험으로 대체되고 있다. 특히 CBT에 기반한 변호사시험의 시행은 혁신의 촉발이다. 사회 전반은 이미 디지털 세상이지만 아직 각종 시험은 아날로그 시대에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나 시험 방식에도 큰 변화가 도래하였다. 이제 변호사시험을 컴퓨터로 칠 수 있게 되었다.
정부가 발표한 국가기술자격 혁신 방안에는 한국산업인력공단의 국가기술자격 응시 방식이 기존 지필시험(PBT)에서 컴퓨터기반시험(CBT) 방식으로 단계적으로 전환된다는 내용이 있다. 종이로 치르던 아날로그 방식의 데이터를 컴퓨터에 기반한 디지털 데이터로 운영·관리함으로써 ‘휴먼 에러(human error)’의 가능성을 없애려는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운영과 관리를 위한 시험 문제 출제와 채점은 인공지능(AI)을 활용해서 오류를 최소화하고, 합격선 전후에 있는 주관식 답안은 채점 위원이 집중 검토해 채점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높일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누적되는 빅데이터를 통하여 채점 결과와 시험의 난이도 및 출제 문제의 유형을 분석하여 대규모의 과목 과락 문제를 예방할 수 있고, 또한 사전에 ‘더미(dummy) 문제’를 통해서 난이도를 예측할 수 있게 된다. ‘더미 문제’란 실제 시험 점수에는 반영되지 않지만 다음 시험에서 난이도를 측정하기 위한 '가짜 문제'이다. 그리고 디지털화된 답안 자료를 대상으로 한 AI 방식의 채점은 채점자의 편견과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도록 한다.
미국은 이미 공인회계사와 변호사시험은 CBT 방식으로 시행되고 있다. 미국 공인회계사시험은 대형 체육관에서 종이로 시험을 치르던 PBT 방식에서 2000년대 초반에 CBT 방식으로 변경되어 지정된 센터에서 컴퓨터로 시험을 치르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미국 변호사시험은 여전히 대형 강당이나 실내체육관에서 치르는데 객관식(MBE)은 지면으로 시험을 치르고, 주관식 서술형 시험(MEE)과 실제 문서작성(MPT)은 각자가 휴대한 노트북을 사용하여 답안을 작성하고 이를 지정 사이트에 탑재한다.
필자 주요 이력
▷부산대 번역학 박사 ▷미국 University of Dayton School of Law 졸업 ▷대구가톨릭대 영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