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아파트 ‘흔적 남기기’...문화보존 VS 도심흉물

2018-03-28 14:37
반포·개포·잠실주공 한 개 동 남기면서 재건축...“울며 겨자먹기로 수용”

서울시 재건축 아파트 보존 사례.[그래픽=김효곤 기자 hyogoncap@]


서울시가 재건축과 재개발 등 정비사업 과정에서 이른바 ‘흔적 남기기’를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시가 아파트 재건축 시 한 개 동을 남길 것을 권고하면서 남겨질 낡은 건물이 흉물스럽다는 주민들의 반발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 반포주공 1단지 108동, 주거역사박물관으로

내년 초 이주가 예정된 서초구 반포주공 1단지(1·2·4주구)는 기부채납을 통해 아파트 한 개 동(108동)을 남기기로 했다. 전체 66개 동 가운데 남겨진 동은 주거역사박물관이 될 예정이다.

1974년 지어져 40년 넘은 역사를 가진 이 아파트는 2210가구의 대규모로 1970년대 강남 개발의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 시의 판단이다. 현재 5층 높이인 이 동엔 리모델링을 통해 전시실과 체험실이 들어서게 된다.

반포주공 1단지에 앞서 기존 건물을 남긴 사례는 강남구 개포주공 1·4단지다. 1단지에선 15동 한 개 동과 4단지에선 429·445동 두 개 동 가운데 일부가 남게 된다.

재건축 후 6400여가구의 대단지로 바뀌게 될 송파구 잠실주공 5단지도 마찬가지다. 총 30개 동 가운데 한 개 동(523동)을 남기기로 했다. 이 단지 또한 시가 중앙난방 시스템 등 주거생활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재건축 뿐만 아니다. 시가 추진하고 있는 도시재생 사업도 이전 건축물을 그대로 남기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지난해 9월 공원으로 탈바꿈한 마포구 석유비축기지는 석유 저장탱크를 그대로 보존한 상태로 선보였으며, 성동구 삼표레미콘 부지 설계공모전에서는 시멘트 저장고를 공기정화탑으로 활용하는 작품이 뽑혔다. 

◆ 주민들 “사업 추진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시의 이러한 ‘흔적 남기기’는 2012년 발표한 ‘근현대 유산의 미래유산화 기본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문화재는 아니지만 근현대 자산을 미래유산으로 지정해 보존하겠다는 것이다. 올 초에는 임대료 인상 문제로 폐점 위기에 처했던 미래유산인 ‘공씨책방’이 시의 도움으로 기업의 후원을 받기도 했다. 지난해 말까지 시는 총 451개를 미래유산으로 선정했다.

시는 일본의 오모테산도 힐즈와 도쥰카이 아파트를 사례로 들어 흔적 남기기가 세계적 흐름임을 강조하고 있다. 도쥰카이 아파트는 1920~1930년대 도쿄·요코하마 중심으로 건설된 주거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곳으로 관동대지진 이후 내진을 강조해 설게돼 전기·도시가스·수도 등 근대식 설비를 살펴볼 수 있다.

1927년 도쥰카이가 건설한 오모테산도의 아오야마 아파트는 준공 당시 고급아파트로 꼽혔던 곳으로 1945년 도쿄 대공습에도 불에 타지 않고 남았다. 2003년 철거를 앞두고 보존하자는 움직임이 일었고 한 개 동이 그대로 남았다.

앞서 언급한 단지들 외에 지금까지 제안된 미래유산 목록 중 아파트는 국내 최장수 아파트인 충정아파트(1937년 준공)가 올라와 있다. 제안된 대상은 서울시 미래유산보존위원회 심사를 통해 미래유산 예비목록으로 선정된다. 현재까지 미래유산에 아파트가 포함되진 않았다.

하지만 시의 이런 흐름은 시민들과 괴리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재건축 단지는 인·허가권자인 시의 말을 들어야 사업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권고 사항을 받아들였다는 입장이다. 잠실주공 5단지 인근 A공인중개업소 대표는 “낡아서 재건축을 하겠다는 건데 주민들은 흉물스러운 건물을 왜 남기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며 “사업이 늦어지면 좋을 게 없으니 하나 내어주고 하나 받는다는 생각이다. 50층을 얻기 위해 내줬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