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공터에서' 출간한 소설가 김훈…"아버지와 살아온 야만의 시대 그렸다"

2017-02-07 07:50
2011년 '흑산' 이후 6년 만에 신작 선보여…70년간의 '갑질' 사회 조명

소설가 김훈이 지난 6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신작 '공터에서'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해냄 제공]


아주경제 박상훈 기자 ="우리 아버지는 1910년 우리나라가 망한 해에 태어났고 저는 우리나라 정부 수립하던 1948년에 태어났습니다. 1910년과 1948년이라는 숫자가 우리 부자(父子) 생애에 좌표처럼 있는 것이죠. 저나 저의 아버지나 그 시대의 참혹한 피해자였습니다."

소설가 김훈(69·사진)은 지난 6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장편소설 '공터에서'(해냄)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나의 아버지 세대와 나의 세대가 다뤄온 일들을 긴 글로 쓰고 싶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공터에서'는 그가 2011년 '흑산'을 내놓은 이후 6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이다. 

"마동수(馬東守)는 1979년 12월 20일 서울 서대문구 산외동 산18번지에서 죽었다."라는 '김훈스러운'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 '공터에서'는 191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고난의 시대를 살아온 마동수와 그 아들들을 다룬 작품으로, 비극의 한국 현대사를 버텨내야만 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김훈의 아버지 김광주(1910~1973)는 소설 속 '아버지' 마동수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고, 일제강점기 김구 휘하에서 항일운동을 했다. 해방 이후 경향신문 문화부장을 지낸 언론인이자 국내 최초의 무협지 ‘정협지’를 쓴 작가였던 부친에 대해 김훈은 "아버지는 김구 선생과 관련된 독립운동가라고 주장했지만 그렇게 볼 수는 없었고, 나라를 잃고 방황하는 유랑 청년 중에 하나였다"며 "그 유랑의 모습이 내 소설에 그려져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글을 쓰게 된 동기로 '아버지의 고통'을 언급하며 "아버지 세대에 대해 쓴다는 것이 내 평생 짐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지만 저런 삶을 살아선 안 되겠구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제목이 '공터에서'인 것에 대해 "주택과 주택 사이의 버려진 땅, 나와 내 아버지가 산 시대를 공터라고 봤다"고 설명했다. 

소설엔 식민, 독립운동, 해방, 한국전쟁, 독재 등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배경으로 제시되지만, 김훈은 그러한 시대에도 불구하고 국가 이데올로기에 휘둘리지 않는 '개별자'들로서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이 작품에 영웅이나 저항하는 인간 따위가 나오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기 위해, 즉 아버지와 자신이 살아온 시대를 정리하기 위해 지나간 시대의 신문을 많이 봤다. 그는 "우리 사회 70년 동안의 유구한 전통은 다름 아닌 '갑질'이었다"며 "한국전쟁 때 50만명이 한겨울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피란을 가는데, 고관대작들이 응접세트와 피아노를 군용트럭에 싣고 피란민들 사이를 질주해 내려간 사실이 당시 신문에 톱기사로 났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는 "아, '나는 이런 나라에 태어나 글을 쓰고 있구나'를 새삼 깨달았다"며 "한없는 폭력과 억압, 야만성이 지금까지도 악의 유산으로 세습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해부터 100일 넘게 이어지고 있는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를 '관찰자' 입장에서 두 차례 체험했다는 그는 "해방 70년이 지났지만 마치 엔진이 공회전하듯 같은 자리에 계속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계속 철거되는 가건물 안에서 살아왔는데 그 집이 또 헐리겠구나 하는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며 "위정자들이 저지른 난세를 광장 군중들의 함성으로 정리한다는 것은 크나큰 불행이지만 그 와중에 희망의 싹이 또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훈은 세월호에 대한 소설을 구상 중이지만 아직 어떻게 써야 할지는 정하지 않은 상태다. 그는 "세월호 사태 다음날 스스로 목숨을 버린 교감선생님에 대해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은 글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결국 종교의 영역으로 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