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76]활발한 연구활동 전개, 서관 건물 준공
2016-08-01 13:52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76)
제4장 재계활동 - (71) 고려대 석조건물(石造建物)
제4장 재계활동 - (71) 고려대 석조건물(石造建物)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고려대학교 재단이 교수들의 연구를 격려하기 위하여 특별연구비를 지급하기 시작한 것은 1957년 4월 1일에 가서였다.
고려대학교 부속기관으로 아세아문제연구소(亞細亞問題硏究所)가 1957년 6월에 창설되고, 1957년 5월에 설치된 한국고전국역위원회(韓國古典國譯委員會)는 1963년 6월에 민족문화연구소(民族文化硏究所)로 확대 개편되었다. 기업경영연구소(企業經營硏究所)는 1958년 6월에 창설되어 처음에는 상과 대학 부속기관의 성격이었으나 1960년 학교 부속기관으로 되었다.
재단법인 한국기술연구원(韓國技術硏究院)은 1964년 1월 경제기획원으로부터 설립인가를 얻어 발족하였는데, 고대 기업경영연구소(高大 企業經營硏究所)와 경영신문사(經營新聞社)를 부속기관으로 두고 고대 경영대학원과 이공대학을 지원하는 것을 당면 목표로 하고 있다.
기록을 통하여 이해할 수 있는 우리의 역사는 기원 3세기 이후에 속한다면 그 이전의 역사는 고고학상의 업적에 기대할 수밖에 없겠는데, 박물관에서는 그동안 이 고고학상의 제문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겠다.
(가) 3차에 걸쳐 웅천패총(熊川貝塚)을 발굴하였다.
1차는 1959년 9월, 2차는 1961년 8월, 3차는 1964년 6,7월에 각각 있었다. 3차에 걸친 발굴에서 출토한 유물은 토기(土器)·철기(鐵器)·골각기(骨角器) 등 총 4000점에 달한다.
(나) 이와 병행하여 경기도 광주 지방(미사리(美砂里))에 있는 선사시대의 주거지(住居趾)를 2차에 걸쳐 발굴했던 바 1961년 6월과 1963년 6월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강화도와 영종도 등지의 선사유적을 답사하였는데, 1960년 11월에서 1964년 11월에 걸쳐 58회에 이르는 답사가 그것이다. 이는 웅천패총(熊川貝塚)을 이해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연구활동으로서는 논문집의 간행을 들 수 있다. 환도한 후 학교의 기구가 확장되고 여러 가지 시설도 갖추어져 200여 명의 교수의 5000여 명의 학생을 가진 큰 종합대학으로 발전하였고 교수들의 생활도 차차 안정되어 각 단과대학별 교수들의 연구논문집 발간을 비롯하여 특별연구비의 지급과 부속 연구소 및 각종 연구기관과 제도가 마련된 결과이다.
1955년 4월에 유진오(兪鎭午) 총장이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로부터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도 또한 자극이 되었다.
현재 본관을 중심으로 동편에 중앙도서관이 서 있고 서편에는 서관 6층의 석탑이 서 있다.
서양 중세의 전형적인 성탑(城塔)을 모방한 도서관 석탑에 비하면 서관의 그것은 다분히 현대적 감각을 풍겨준다. 고려대학교의 건물 배치는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의 구상을 박동진(朴東鎭)의 설계로 완성한 것이다. 인촌은 영국에 머무를 때 아일랜드에 두 달 남짓 여행하면서 그곳 대학 시설들을 면밀히 조사하고 돌아와 구상한 것이 오늘의 고려대학교 건물인 것이다.
서관은 6·25 전 인촌이 본관을 사이에 두고 동쪽의 도서관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박동진에게 설계를 의뢰하여 착공했던 것이나 막상 정지작업(整地作業)을 끝내고 기초공사에 들어갈 무렵 6·25의 포성으로 모든 것이 허사가 되었던 것을 환도 다음해인 1954년 5월의 5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서관 건축공사를 재개했었다. 그러나 거대한 설계를 한꺼번에 다 이룰 수는 없어서 4000만환의 예산으로 계단교실이 있는 일부분만 착공하였다. 병중임에도 인촌은 자주 현장에 나와 여러 가지를 지시하곤 하였으나 불행히도 완성을 보지 못하고 타계하고 말았다.
이렇게 착공된 서관 일부 공사는 예정대로 준공되어 50주년 기념식전에서 재단 주무이사 이활의 이름으로 학교에 증정되었던 것이다. 즉 1961년 5월 준공되었는데 12년 동안이나 걸려 완성된 이 건물은 총연건평(總延建坪) 2000평을 고려대학교 최대의 석조건물 가운데 하나이다. 본관과 동관 및 서관은 제가끔 개성미를 지닌 예술품이며 일제와 해방 후라는 상이한 시대감각을 보여주는 한국건축사(韓國建築史)의 대표적 건물인 것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목당은 인촌의 뜻을 살리기에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