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66]이승만 3선 파동에 인촌 반기 들어

2016-07-27 17:20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66)
제4장 재계활동 - (61) 숙명적(宿命的)인 싸움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환도(還都)와 함께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는 목당(牧堂) 이활(李活)보다 한발 앞서 서울의 계동 자택으로 돌아와 있었다. 대구에서도 신통한 효험을 보지 못한 그여서 서울 귀환을 서둔 데도 있었지만 2년 8개월 전에 떠날 때와는 또 달리 병도 더 깊어지고 실의까지 겹쳐 안고 돌아온 그였다. 인촌이 한민당(韓民黨) 당수로 있을 때는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자주 만날 수 없었던 목당이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다시 옛날의 관계로 돌아가 일만 있으면 목당은 인촌을 찾아가곤 하였다.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는 유진오(兪鎭午)가 2대 총장으로 있었고 동아일보(東亞日報)는 인촌을 고문으로 하고 최두선(崔斗善)이 사장으로 있었다.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에서 인촌은 최고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나 그 대표격인 그는 중환으로 병석을 떠나지 못하고, 다른 최고위원중 백남훈(白南薰)은 대통령 저격미수사건으로 수감중에 있는가 하면 이청천(李靑天)은 정치파동 때 당을 떠나버렸다. 남은 최고위원은 신익희(申翼熙) 뿐이었는데, 그는 초당적 처신이 요구되는 국회의장이었고, 게다가 사무총장 조병옥(趙炳玉)은 이승만(李承晩)의 포로석방에 재를 뿌렸다 하여 테러를 당한 뒤에 구속되었다. 석방된 뒤에는 정계(政界) 은퇴를 성명하고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다. 남은 중진은 서상일(徐相日), 김도연(金度演), 김준연(金俊淵), 이영준(李英俊) 등이었는데 이들은 국회의원이 아니었다. 이런 사정을 보아도 알 수 있듯 민주국민당의 당세(黨勢)는 말이 아니었다.

이 무렵 인촌은 약간 병세에 차도가 있어 자동차로 교외에 나가 바람을 쐬는가 하면 때로는 조금 더 멀리 명승지를 찾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목당도 인촌이 붙잡으면 그냥 눌러앉아 한담을 즐겼다. 그러나 그때 인촌은 또 하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신익희가 민주국민당에서 이탈할 기미를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목당은 가능한 한 정치 이야기엔 깊이 개입하는 것을 피해왔고 그것을 아는 인촌은 구태여 목당을 붙잡고 정치 이야기를 하려 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서로 편했고, 깊은 신뢰와 우정으로 담담한 교분을 가질 수 있었다. 마침 고려대는 서관(西館) 건축을 시작하고 있어서 목당은 인촌과 함께 현장에 나가 보기도 했다. 집에 누워 있을 때면 의사가 시키는 대로 정원을 거니는 보행 연습을 해야 하므로 그것이 싫어 인촌은 목당을 끌고 서울 근교의 여주나 남한산성 등지로 드라이브를 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고적한 병상생활에 그래도 자주 찾아주는 사람이 송필만(宋必滿)과 목당이었으니까.

병석의 인촌은 차츰 스스로 병자를 자처하여 정계를 완전히 떠난 일개 야인으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는데 이승만의 종신집권(終身執權)을 위한 개헌공작이 표면화하자 인촌은 갑자기 달라졌다.

“3선(三選)은 역사가 용서하지 못해 목당 어떻게 생각하나?”

목당은 이런 인촌을 바라보며 3선 파동이 인촌의 생명을 빼앗고 말지 않을까 하는 불안을 느꼈다.

“병상의 몸인데 일은 딴 동지들에게 맡기고 심기를 편안이 하시오!”

“날더러 강 건너 불구경을 하란 말이오? 그럴 순 없어!”

목당은 안타까웠다. 인촌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헤아리지만 그가 중병을 무릅쓰고 또 한 번 이승만과 죽음의 결투를 전개하러 나선다면 그건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선 이승만의 적수가 못 되었다. 본인도 그것을 알면서 대의명분(大義名分)에 죽겠다는 의지만이 그를 부추기고 있었다.

1954년 11시 29일의 일이다. 인촌은 현충사를 거쳐 온양온천에서 개헌(改憲)이 부결된 것을 라디오로 듣고 기뻐하였으나 천안을 거쳐 서울로 올라오는 차 속에서 라디오로 사사오입 개헌(四捨五入 改憲) 소식을 다시 들었다. 분노와 절망으로 말을 잊은 그는 꼼짝하지도 않았다. 옆에 동승했던 부인은 그가 실신한 줄 알았다는 것이다.

인촌은 이승만의 3선을 막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민국당(民國黨) 간부들에게 민국당을 해체하고서라도 재야민주세력을 망라한 신당(新黨)의 조직을 당부했다.

결국 당(黨) 간부들도 인촌의 뜻을 쫓기로 하여 신당 결성에 나섰다.

그러나 신당 출현엔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고 결국 인촌은 신당의 발족을 보지도 못하고 1955년 2월 18일 세상을 떠났고, 신당은 그가 별세한 뒤인 그해 9월 19일 민주당(民主黨)이라는 이름으로 발족하고 있었다.

목당은 대의명분의 죽음을 택하여 이름을 더럽히려 하지 않았던 인촌의 반독재(反獨裁) 투쟁의 생애를 이해하고 존경하는 것이었다. 장기집권의 아집에 사로잡힌 독재자 이승만과 대의명분에 살려한 인촌과의 대립은 숙명적인 것이었으며, 그 승부는 4·19학생의거(學生義擧)에 가서야 비로소 역사의 심판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