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65]설봉 부부 중신으로 새 생활
2016-07-26 15:42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65)
제4장 재계활동 - (60) 재혼(再婚)
제4장 재계활동 - (60) 재혼(再婚)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목당(牧堂) 이활(李活)의 나날은 다시 옛날 칩거시대의 생활로 돌아갔다. 국내외 신문을 정독하고 시선(詩選)이나 문집(文集)들을 뒤적이는 독서삼매(讀書三昧) 그리고 바람을 쐬기 위해 인사동 단골책방인 통문관(通文館)과 골동서화점 금(金)돌이집으로 나들이하는 일이 그의 일과(日課)였다고나 할까. 가끔 어울리는 친구가 있다면 우계(友溪, 전용순)와 동은(東隱, 김용완)이 있었고, 설봉(雪峰, 전택보)과 오정수(吳楨洙) 정도였다. 동은은 경방(京紡) 공장 복구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복구 자금을 얻어내려니 야당의 정치자금화할 우려가 있다고 하여 동결당하는 등 부당한 탄압에 그는 울화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를 위로하기 위해 우계와 우당(友堂, 이중재) 등은 자주 동은을 술집으로 끌어냈고, 목당도 자리를 같이 하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술이 거나해지면 명랑하기 그지없는 목당이다. 이들의 술좌석은 농에서 농으로 끝나는 그런 술자리였고 목당은 때로 이들에게 상배(喪配, 아내를 떠나보냄)한 뒤의 허전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 사람아, 그럼 장가를 가면 될 게 아니야. 내가 중매를 서지.”
“집안에서 기생 출신을 들일 수 없다는 거야!”
그런 사정이고 그런 위인임을 모르지 않는 동은이었다.
이런 터에 이번에는 설봉(雪峰) 전택보(全澤珤) 부부가 마땅한 여인이 있다고 중신을 들고 나섰다. 첫인상이 좋았다. 나이가 10년차 여선지 생동감이 있었다. 만주에서 이름을 떨치던 대지주의 딸로, 일본에서 자랐다고 했다. 설봉은 일제 때 청진을 본거지로 만주와 중국을 상대로 폭넓은 무역을 해왔는데 당시 무단장(牧丹江, 중국 헤이룽장성 남동부, 무단 강 상류 연안에 있는 도시)을 건너다니면서 알게 된 집안이었다.
목당에겐 당자가 나무랄 데 없었다. 목당은 그 나이 열셋에 조혼(早婚)한 터이라 전처와는 애틋한 정을 느껴 보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시골 규수로 자라나 층층시하의 어른들을 모시는 가운데 신혼생활을 보냈고, 그것도 2, 3년 마에 외유(外遊)의 길을 떠나 37세에 돌아오니 아내는 벌써 42세로 단산기에 들어서 있었지 않았는가. 여자관계에 있어 철저하게 결백했던 목당이다. 13년 동안의 외유생활에서 일본에서나 영국에서 여자교제를 모르고 지낸 목당이었다. 목당이 세상을 뜨기 얼마 전의 일이다. 인촌전기(仁村傳記)를 쓴다는 기자가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의 생활 주변 이야기를 수집하기 위해 목당에게 인촌의 여성관계를 짖궂게 묻고 물었다.
“여자관계에 관하여만은 인촌이나 설산(雪山, 장덕수)이나 나나 모두 담백했어요. 세 사람은 술을 잘하는 편이었지요. 나는 위스키 한 병을 거뜬히 비우곤 했지요 처음에 설산이 미국에서 런던으로 건너왔을 땐 술을 못했어요. 그런데 나하고 어울리어 다니다 보니 어느덧 주량이 늘었지요.”
목당은 무역협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요정 출입이 많았다. 때로는 술을 사양치 않고 마시며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고 팁을 뿌리기도 했지만 기생의 손 한번 잡는 일이 없었다.
그의 생할은 그만큼 너무나 근엄했다. 그렇던 그가 재혼을 위해 몇 여인을 대하던 중 설봉 부부가 소개한 남(南)씨 부인에게 마음이 끌림을 느낀 것을 보면 그는 애정생활에 갈증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계와 동은이 소개한 기생은 미모인데다가 세련된 분위기가 있었음에도 몇 번 자리를 같이 하는 동안에 목당은 어딘가 부족함을 느꼈다. 삶의 생동감이 결여된 그런 미(美)였던 것이다.
그가 요구했던 것은 생활 의욕을 지닌 생동미(生動美)와 애정에도 농후한 그런 정상적인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목당은 남씨 부인에게서 발견했던 것이다. 6개월 남짓 교제 끝에 남씨와 결혼을 한 것은 해를 넘긴 1964년 7월이었다. 남씨 부인을 맞아들이기 위해 목당은 사직동 집을 처분하고 필동에다 살림집을 마련했고, 병린(秉麟) 내외는 할아버지를 위해 약수동에 따로 집을 마련해 나갔다.
목당은 오랜 고적한 생활에서 회춘(回春)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목당의 생활 주변은 일신되어 갔고 제2의 인생은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낮에는 아내와 같이 골동·서화를 보러 다니고, 집에 돌아오면 한복차림으로 서재에 앉아 시선을 뒤적이고 고인(故人)들의 문집을 더듬었다. 저녁상에서 반주(飯酒)를 하다가 흥이나면 두주(斗酒)를 사양치 않고 춤을 덩실덩실 추기도 하는 평소에는 장중하고 근엄한 목당이 치기(稚氣, 철없는 상태)를 드러내는 이런 장면에 대해, 목당을 오래 섬긴 오학근(吳學根, 전 무역협회 전무)은 초중여범 왕후장상(超衆如凡 王侯將相)감이었다고 말했다. 출중하면서도 가식이 없는 그를 이렇게 표현하면서 그는 대체로 그릇이 큰 사람들이 치기를 겸비하고 있음을 저적하였는데, 목당이 바로 그러했던 것으로 재혼 신접살이에서 목당은 분명히 새로운 의욕과 정열을 얻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