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70]교려대 재정문제로 고민
2016-07-28 13:01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70)
제4장 재계활동 - (65) 요구되는 확고한 신념
제4장 재계활동 - (65) 요구되는 확고한 신념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기념식은 유진오(兪鎭午) 총장의 노력으로 그 어느 때의 기념식과 달리 총장 이하의 교직원·학생 전원과 재단이사·교우·학부형 및 내외귀빈 수만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날 기념식 석상에서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학위(學位) 가운을 걸치고 대법원장 김병로(金炳魯)에게 명예학위를 수여하는 영예를 가졌다.
명예학위의 수여는 이것이 처음이었으므로 당초엔 명예학위 제1호를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에게 수여할 계획이었다는 것인데 작고한 고인에게 학위를 추증(追贈, 나라에 공로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 그 관위를 높여 줌)할 수는 없는 일이므로 이사회에서 숙의한 끝에 김병로로 정한 것이다.
그리고 오후에는 이용익(李容翊)·김성수·현상윤(玄相允)의 초상은 도서관 열람실에 걸고 현상윤의 초상은 총장실에 걸었다. 손병희(孫秉熙)의 초상은 납품이 늦어 그해 10월에 제막식을 거행한 다음 역시 도서관 열람식에 걸었다.
이날 하늘은 맑게 개고 철쭉꽃이 붉게 핀 가운데 기념 촬영도 행해졌고 저녁에는 중앙도서관 대열람실에서 내빈과 교직원 및 교우(校友) 수백 명이 모여 대향연(大饗宴)을 벌였다. 고려대학교가 발족한 이래 처음 갖는 성사(盛事)요 장래를 다짐하는 하루였다.
50주년 기념행사를 무사히 끝마치고 전례가 없다는 대향연까지 치뤘지만 고려대학이 정말 대학다운 대학으로 크기 위해서는 많은 과제가 남아 있었다. 목당이 재단 내용을 살펴보니 농지개혁(農地改革)으로 학교의 기본 재산을 상실하고 지가증권(地價證券, 토지 개혁 때 정부에서 매수한 토지의 보상금으로 지주에게 발행한 유가 증권)을 받아 쥔 이후 전주방직(全州紡織)을 불하받고는 있었지만 학교 재정을 돕기는커녕 공장을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만도 계속적으로 막대한 추가투자(追加投者)가 요구되고 있었다. 해방 후로부터 6·25 남침 중에 우후죽순같이 새로 생긴 수많은 대학들과 재정면(財政面)에 있어서는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이었다.
목당은 이사회의(理事會議)에 참석하면서 재단의 어려움을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막상 사무를 관장하고 보니 어이없는 실정이었다. 그러니 고려대학도 학생 등록금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다른 대학들은 경쟁적으로 학생정원을 늘림으로써 재정을 확보하고 있었으나 1954년 봄 이후로는 이 문제가 엄격한 문교부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어 학교재단(學校財團)이 임의로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동란중 재정적 기초도 없이 대학들이 학생 등록금을 받아들이는 것을 목적으로 다투어 설립되고 보니 대학은 영리사업화(營利事業化)하고 학생 정원은 이권화(利權化)하여 학과 증설이나 학생정원 증가는 문교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학과나 학생정원 문제는 어느결에 학원이나 문교행정 부패의 원천이 되고 있었는데, 문교부는 이 문제를 다루는 데 역사가 오래되고 신용이 있어서 지원생들이 많이 찾는 학교나 그렇지 못한 학교나 공평하게 다루는 묘한 분배방식을 취해 오고 있었다.
이 문제를 차라리 각 대학의 자유경쟁에 맡겼더라면 흥할 학교는 흥하고 망할 학교는 자연히 도태되어 대학이나 대학생의 과잉 문제는 나오지 않았을 터인데 문교부는 세간의 대학망국론(大學亡國論)도 아랑곳없이 각 대학을 공평하게 다루는 데 주력하여 결과적으로는 전통 있는 학교의 성장과 확대를 억압하고 그렇지 못한 학교를 보호 육성하는 해괴한 행정을 펴왔던 것이며 그렇게 되고 보니 고려대학과 같은 전통을 중시하는 대학들의 피해는 적지 않았다.
이런 판국에 목당은 고려대학교 재단 주무이사의 중책을 맡게 되어 대학운영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요구되었다, 자칫하면 인촌의 사업에 먹칠을 하는 일이 될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