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67]인촌의 유언 “나라의 앞날이 걱정이다”

2016-07-27 17:23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67)
제4장 재계활동 - (62) 인촌의 죽음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의 죽음을 재촉한 것은 뇌혈전증(腦血栓症, 동맥경화로 좁아지거나 내벽에 문제가 생긴 뇌혈관을 혈전이 막아 뇌의 혈액공급을 차단시켜 나타나는 증상)이 아니라 갑자기 나타난 위출혈(胃出血)이었다. 인촌은 어려서부터 위가 튼튼하지 못하였다.

2월 초순에도 대청에서 보행 연습을 하다가 갑자기 위출혈을 일으킨 일이 있었으나 치료 끝에 수그러지는 듯했는데 2월 15일경에 그는 두 번째로 크게 위출혈을 일으켰다. 수혈(輸血)로 위험한 고비는 넘겼으나 병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목당(牧堂) 이활(李活)의 아들 병린(秉麟)이 줄곧 인촌 곁을 지키면서 그때그대 병세를 알려주고 있었는데, 마침내 의사는 일체의 면회를 금지했다는 것이 아닌가. 목당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 하번 만나고 싶었다. 사돈간의 의리에서가 아니라 친구의 정의(情誼, 서로 사귀어 친해진 정)로서 하직인사를 하고 싶은 것이었다. 인촌의 병상은 그의 아주(娥珠) 부인이 지키고 있었는데 목당이 찾아갔을 때의 인촌은 전날보다 훨씬 나빠져 있었다.

“어서 와요.”

하는 말소리가 힘겨워 보일 지경이어서 목당은 말없이 다가가 손을 꼭 잡아 주었다. 핏기없는 손은 차가왔다.

“기운을 내요.”

“갈 때가 왔는가 보오.”

“무슨 말씀을, 하실 일이 태산 같은데.”

복된 집안에 태어나 순탄하게 성장하였고 사회에 나와선 자책 받을 일 하나도 없이 대의명분(大義名分)에 살아온 그는 그동안 죽음에 대해 말한 일이 없었다. 목당 또한 그러했다. 다복하게 태어나 후회할 일 하나 저지른 일 없이 살아왔다. 인촌과 목당은 너무나 비슷한 점이 많았다.

다만 다른 것이 있었다면 인촌은 정계에 나가 모진 격랑을 겪어야 했는데 비해 목당은 재계로 나감으로써 가히 무풍지대(無風地帶)를 걸어온 것이 다를까. 지난날 런던에서 첫 대면했을 때 인촌은 경제력 배양만이 조국의 독립을 약속할 것이며 그 방안을 찾기 위해 실용경제(實用經濟)를 다루는 경제연구과(經濟硏究科)를 택했노라고 말하는 목당에게 진지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훌륭한 일꾼이 돼 주시오.”

인촌은 쓸모가 있는 일꾼이라면 놓치지 않았다. 그때부터 의기투합하여 교분을 맺어온 두 사람이 아니던가. 목당 집안으로서는 이렇다 할 사회사업을 일으킨 것이 없어서 해방이 되면서 인촌의 교육사업에 일부를 보탬으로써 그의 활동에 찬동을 표시한 것이 아닌가.

인촌과 사돈을 맺은 것만 해도 그러했다.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의 부인 박은혜(朴恩惠)가 중매를 주선했을 때는 인촌 집안이나 목당 집안 어느 쪽에서도 이의가 있을 리 없어 양쪽 다 같이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인촌과 목당의 교분은 그만큼 담담하면서도 깊었던 것이다.

그런 인촌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지금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어제까지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라곤 상상조차 해보지 않던 인촌이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미 설산이 갔고 이제 인촌이 간다면 목당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게 된다. 인재들은 가고 자기만이 남는구나 생각하니 목당의 가슴은 메어질 것만 같았다.

인촌의 위독상태가 보도를 통해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된 것은 2월 17일에 가서이며, 그러자 18일엔 이미 인촌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날 오늘을 넘기기 어렵다는 전갈을 받고 다시 인촌댁을 향해 떠나며 목당은 남씨 부인에게, 오늘 밤은 돌아오기 어려울 것 같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계동 인촌댁을 들어서는데 찬미가 소리가 들려왔다. 목당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장면(張勉)이 아주 부인을 통해 천주교에 입신(入信)토록 권유했고, 인촌이 그를 받아들여 가회동 성당의 신부가 와서 영세를 받았다는 것이다. 송필만(宋必滿)과 유홍(柳鴻)이 일을 거들고 있었는데 사랑채에 앉아 있자니 오후 5시경 가족들이 모두 병실로 불려 들어가고 있었다. 운명의 시각이구나 짐작이 갔다.

“나라의 앞날이 걱정이다.”

민족의 거물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는 이 한마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은 것이다. 숨을 거둔 것은 1955년 2월 18일 항 5시 25분, 향년 65세였다.

목당은 오랜 친구 인촌을 이렇게 잃었다. 19일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부인과 함께 계동으로 찾아와 영전에 향을 피우고 “우국자가 돌아갔어” 한마디 중얼거리고 갔다. 그리고 이 광경을 지켜보는 목당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