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73]갑작스러운 해공의 별세, 민주당 신·구파 갈등
2016-07-29 11:16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73)
제4장 재계활동 - (68) 고대생의 체포
제4장 재계활동 - (68) 고대생의 체포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서거의 부음이 알려지자 온 국민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충격을 받았다. 영구가 서울역으로 돌아온 시각의 역전은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고 효자동 자택으로 운구되는 길을 메우면서 시민들은 뒤를 따랐다. 그리고 운구행렬이 효자동 어구에 이르렀을 때 통분한 군중들은 시위에 돌입하였다. 긴급 출동한 경철은 이를 제지코자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자연발생적인 수십만의 시위군중은 몇 시간 동안 경찰과 대치하면서 충돌하다가 무차별 체포로 300여명이 끌려갔고 이중 수십 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 가운데는 고려대학교 학생 정국노(鄭國老)와 이용곤(李鎔坤) 등 두 명도 끼여 있었다. 고려대학에선 교수회의가 열리고 대책을 논의했지만 별 방책이 있을리 없었고 사태를 관망할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은 결국 재판에 회부되어 체형을 받았다.
소위 경무대 앞 소요사건(騷擾事件)에서 2명의 고대(高大) 학생이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받자 학생사회(學生社會)는 잠에서 깬 듯이 술렁거림을 보이기 시작했다. 일종의 학원 반동기(反動期)라고 할까, 시련기(試鍊期)라고 할까. 그런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 후보를 잃은 민주당은 진퇴유곡에 빠져 추모투표(追慕投票)포 저항하기로 하고 부통령 선거에 온갖 힘을 기울였다.
5·15 정·부통령 선거는 개표 결과 대통령에 이승만(李承晩), 부통령에는 장면(張勉)이 당선되었다. 이 선거에서 서거한 해공에 대한 추모표(追慕票)가 180만 표나 된 것은 만약 그가 생존해 있었더라면 단연 이승만을 압도했을 것이라는 것을 웅변으로 입증해 주고도 남았다.
자유당은 부통령 선거에서 그 많은 부정에도 불구하고 고배를 들게 됨으로써 민심(民心)의 반발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은 실추된 권위를 되찾는 데 보다 더욱 고압적인 태도로 나섬으로써 8월 6일에 실시된 시·읍·면장 선거와 13일에 실시된 서울특별시 및 각 도 의회(議會) 의원 선거에서는 그 양상이 더욱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지방선거일(地方選擧日)이 공고되자 야당계열 입후보 예상자들에 대한 검거 선풍이 불어닥쳤다. 경남에서 도의원(道議員) 입후보 예정자가 36명이나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지는가 하면 등록 방해 사건이 빈발하자, 야당의원(野黨議員)들은 마침내 7월 27일 ‘민권(民權)없이 국권(國權) 없다’ ‘민권의 붕괴는 국권의 붕괴다’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국회의사당 앞을 떠나 시청 앞을 돌아 을지로 입구에 이르는 시위행진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무장 경찰의 저지로 야당의원들은 자진철회하고 의사당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 데모로 김선태(金善太) 의원이 경찰에 체포되어 갔으며 이를 항의하는 이철승(李哲承) 의원은 경찰로부터 욕설과 폭언을 당했다. 야당의원들은 다음날 창랑(滄浪) 장택상(張澤相)을 위원장으로 하여 국민주권옹호투쟁위원회(國民主權擁護鬪爭委員會)를 구성하고 장기 투쟁에 들어갈 것을 결의했다.
가증스러운 것은 범인 김상붕(金相鵬)이었다. 이 자는 장 부통령을 저격하고는 “조병옥(趙炳玉) 박사 만세”를 외친 것이다. 이 연극의 참뜻은 신(新)·구파(舊派)의 당권 경쟁을 가장하려 한 것인 즉, 구파인 조병옥측에서 신파인 장 부통령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인 것처럼 위장하려 한 수작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광복 후 살해된 정치지도자들이 모두 이와 같은 음흉한 위장살인사건이었음을 보아왔다.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와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와 백범(白凡) 김구(金九) 모두가 그러했다. 그리고 그 범인들은 단 한 명도 극형에 처해지거나 종신형조차 받은 일이 없이 오히려 치부하고 영전하는 부조리를 국민들은 보아온 터이다. 이번 사건도 마찬가지로 하수인 김상붕이 체포되어 그 배후를 추궁당하였으나 최훈(崔勳)이란 불량배의 이름이 나타났을 뿐 더는 진전을 보지 못한 채 수사를 종결짓고 말았다.
이 무렵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부친의 노환이 심상치 않아 집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