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3일 10시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 2024년 12월 4일 1시 국회의원 190명의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 가결 - 2024년 12월 4일 4시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해체 선언 - 2024년 12월 7일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국회 탄핵소추안 부결 - 2024년 12월 14일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국회 탄핵소추안 가결.
마침내 대통령이 헌정 파괴를 통한 권력 독점을 시도했다. 후진국 지도자의 폭력적인 통치권 행사였다. 그에 맞서 선진 국민은 결연하게 그리고 용감하게 민주주의의 파국을 막아냈다. 그 과정은 2시간 37분짜리 숨 막히는 다큐멘타리 영화와도 같았고, 한편으로는 11일에 걸쳐 우리의 생명과 질서는 우리 손으로 지켜내려는 시민의 결연한 항쟁의 서사이기도 했다. 계엄과 내란을 겪으면서 혹자는 선진국 대한민국의 후진적 거버넌스의 속살이 드러났다고 우려하고, 혹자는 헌정 질서가 파괴되는 순간에도 목숨 걸고 막아내는 대한민국 국민의 놀라운 민주주의 회복력을 칭송한다. 그 어떤 경우에도 내란 시도는 미화될 수 없고, 내란의 원인은 철저하게 규명하여 역사 속에 길이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임기 중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과 사고에 대한 그의 행보와 대응 방식은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로서 품위는 고사하고 인간에 대한 예의도 찾기 어려운 몰상식과 불공정의 극치를 보여준다. 생떼 같은 청년들의 목숨을 앗아간 이태원 참사, 몰염치의 궁극을 과시한 해병대 채 상병의 익사 사고와 조사단 외압 의혹 그리고 국제적 망신으로 자초한 세계 잼버리 대회의 파행 운영과 부산 엑스포 유치 경쟁 등 어느 것 하나 국민의 눈높이에서 해결하려는 의지도 없고 적절한 대책도 강구하지 않은 채 묵살과 강압으로 일관한다.
그의 정치 스타일은 격노로 표현된다. 그 앞에서 토론은 없고 비판적 의견은 그의 격노를 감수해야 한다. “언론의 자유와 언론기관의 책임을 철저하게 존중하는 것이 우리 정부의 국정철학이다.” 억지와 궤변의 전형이다. 노조의 파업은 최악의 업무개시명령으로 진압하고 고등학생의 풍자만화는 표현의 자유 제약으로 내리누른다. 그 결과는 민주주의 지수의 추락으로 드러난다. 스웨덴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2024. 3. 7 보고서 발표)는 “한국은 민주화에서 독재화로 전환하는 국가다”로 규정했다. 내란 사태에 비춰보면 놀라운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다.
22대 총선에서 여당이 역대급 참패를 기록한 이후 국민은 대통령과 집권 여당의 변화를 기대했다. 집권 여당 내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여권이 방향을 제대로 못 잡으면 예정된 코스는 탄핵이다.”(김해을 낙선자 조해진) “보수 정치인이 오히려 걱정을 더 끼치고 민폐를 끼치는 집단이 되고 있다.”(창원마산합포구 당선자 최형두) 그러나 대통령은 역시 타협을 거부했고, 여당은 민심을 따르기보다 오히려 대통령의 심기를 살피기에 급급했다.
설령 대통령의 오기와 집착을 인정하더라도 비상계엄과 내란은 국민의 상상 밖에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국민은 분노에 차서 그의 파면과 탄핵을 요구한다. 물론 대통령과 국민의 대결은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달려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상식적인 판단과 국민의 분노 지수를 고려하면 당연히 탄핵이 예상된다.
문제는 여당의 행보다. 그들은 현재 대다수 국민의 분노와 여망을 외면하고 비상계엄과 내란을 옹호하며 주도 세력을 감싸면서 정치적 계산에 빠져 있다. 보수 정치세력의 궤멸까지 염두에 두고 옥새투쟁이라도 벌이는 형국처럼 보인다. 8년 전 탄핵의 트라우마를 언급하지만, 사실상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과 다를 바 없다. 이 대목은 21세기 전 세계를 휘감는 민주주의 시스템의 위기, 즉 포퓰리즘의 득세, 정치적 혐오 정세의 확산, 중산층의 보수화, 민주적 가치의 약화 등 세계적인 현상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어떻게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우회적으로 지적하면서도 정치 지형의 현실적 변화를 담고 있다. 저소득 노동자의 지지를 받는 억만장자 정치가의 출현은 21세기형 희대의 포퓰리즘이다. 그것의 뿌리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기능 부전에 있다. 글로벌 경제위기가 증명하듯이 세계 경제는 더 이상 성장곡선을 그리지 못하고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신자유주의는 극단적 불평등을 야기했고, 이를 대체하는 국제정치적 이념과 제도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트럼프의 자국우선주의를 내건 일자리 창출이 인기를 얻는 이유이다. 그에 반해서 불평등의 심화를 도외시하고 오히려 월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듯한 인상을 풍기면서도 정치적 올바름과 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민주당은 유권자에게 외면당했다.
유럽에서도 포퓰리즘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극우파의 집권을 극도로 경계하는 프랑스 국민의 공포심은 마크롱이 중도로 포장하여 대통령이 되는 결정적인 밑거름이었다. 그러나 그의 친기업적이고 반중도적 행보는 시민의 노후를 위협하는 연금 개혁으로 표출되었다. 시장지향적 국정운영은 마침내 내각의 불신임으로 이어지고, 프랑스의 정국은 한 치 앞을 가늠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한편 전통적으로 중산층과 노조의 지지를 받아 집권한 독일 사민당은 16년 만에 집권했지만 조기 총선의 압박에 시달리는 중이다. 메르켈 정부와 대연정을 하면서 전통적인 지지층을 잃은 집권 사민당의 인기는 3당으로 하락한 반면에 중산층 시민의 불안을 자극하고 반시장주의와 외국인 포용을 거부하는 극우 극단주의 세력의 팽창은 우려스러울 정도에 이르렀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훼손과 민주주의 원리의 후퇴는 동전의 양면이고, 이는 극단적 포퓰리스트들이 등장하는 역사적 배경이다. 필자가 보기에 오늘날 진정으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위에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실현하는 국가는 사실상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0.01%의 초부자들의 자본 집중은 날로 심화하고, 99%의 서민은 쳇바퀴 속의 쫓기는 다람쥐처럼 과도한 노동의 세계에서 신음하는 중이다. 그 중간에 놓인 0.99%의 전문직 종사자(또는 노동귀족)들이 파국과 긴장 사이에서 겨우 균형을 잡고 있는 형국처럼 보인다. 물론 그들의 균형추도 조금씩 파국 쪽으로 기우는 중이다. 파국적인 전쟁의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느껴진다.
근대적 민주정치는 정치세력 간의 균형, 즉 상호 견제를 통한 균형 위에 실현되었다. 일방적이고 과격한 폭주는 필시 그만큼의 반동을 낳았다. 역사의 교훈이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지난 총선을 통해 정부에 강력히 경고했다. 그것은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독재화 국가’ 저지, 둘째는 경제적 양극화 저지, 셋째는 차별적인 사회의 저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격 추락의 저지가 그것이다.
보수 정치세력의 퇴출 혹은 궤멸은 정치 생태계의 위기를 초래한다. 불통과 독단에 기초한 윤석열의 리더십을 보수 세력의 이해관계와 일치시키면서 정치적 생존을 도모하는 치졸한 방식으로는 민주적 가치를 실현하고 사회를 통합하는 진정한 보수 세력의 리더십으로 거듭날 수 없다. 결단코 과감히 윤석열을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한민국이 극단적 갈등은 깊은 수렁에 빠질 수 있고, 새로운 통합의 사회를 회복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바야흐로 AI시대이다.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이 미래로 도약하기 위하여 우리가 던져야 하는 ‘최초의 질문’은 무엇일까? 우리의 민주주의 수호를 고려할 때 필자에게는 '민주주의 리더십을 위한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궁극적으로 윤석열의 실패는 독단과 오기에 있었다. 타협과 협치는 그의 사전에 없었다. 어쩌면 윤석열은 우리의 학교 교육과 상명하복의 검찰 문화에서 배태된 ‘순종하는 노예’가 권력을 잡았을 때 탄생한 괴물일지도 모른다. 그의 파트너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 역시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고, 이번 내란 사태를 겪는 와중에 우유부단한 판단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 그는 철저히 국민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행동했어야 했지만 때로는 정치적 이해타산에 빠지곤 했다. 민주적 거버넌스에 대한 이해가 투철하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주지하다시피 근대 과학의 출발점은 '합리적 이성(의심)'이었고, ‘나는 생각하기에 존재한다(Cogito ergo sum)'로 표현되었다. 주체의 합리적 의심은 지적 호기심의 다른 표현이다. 나아가 비판적 이성은 우리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삶까지도 돌아보는 여유를 제공한다. 우리는 너무도 오랜 세월 동안 호기심 대신 수동적으로 지식을 습득하여 우열을 가리는 승자독식의 체계 속에서 교육을 받아왔다. 수능은 그것의 결정판이다. 이제 교육의 플랫폼을 민주시민 양성으로 바꾸고 고등교육의 선진화를 꿈꾸며 민주적 리더십을 키우는 교육으로 성숙한 민주사회를 지향할 때이다.
안상준 필자 이력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 취득 △한국 서양사학회 회장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방문교수 △교수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