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4년 9월 조선 태조의 아들 이방원(李芳遠)이 조공 사절단을 이끌고 명나라 수도 난징(南京)에 갔을 때 일이다. 이 이야기는 박원호 고려대 사학과 명예교수(80)가 2002년에 펴낸 ‘명 초 조선관계사 연구’에 나온다.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이방원에게 뜬금없이 “앞으로 조공할 때 표문(表文)을 올리지 말라”고 했다. 표문이란 조선 왕이 중국 황제에게 조공을 보낼 때 그 이유를 적은 글이었다. 주원장이 이방원에게 앞으로 표문을 올리지 말라고 한 이유는 나중에 알아보니 이방원 일행이 올린 표문 속에 “괴이한 글자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당황한 이방원 일행은 주원장에게 “사대(事大)의 예를 갖추는 데에는 표를 바침으로써 작은 정성이나마 전달할 수 있는데 어찌 표를 바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말밖에는 다른 수가 없었다.
조선과 명 초에 두 나라 사이에 가장 큰 문제였던 표전사건은 나중에 조선이 명 황제 주원장 주변에서 일어난 ‘문자의 옥(獄)’이라는 스캔들을 몰랐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음이 밝혀졌다. 주원장은 명 앞의 왕조인 원(元)나라 말기 홍건적의 난 때 탁발승으로 유랑걸식하며 지내다가 명나라 황제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그런 주원장은 황제에 오른 뒤 탁발승의 대머리를 상징하는 광(光), 독(禿)이라는 글자와 중을 가리키는 승(僧)은 물론 발음이 비슷한 생(生)이라는 글자, 홍건적 시절을 암시하는 적(賊)이라는 글자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조선 왕실이 그런 ‘문자의 옥’ 스캔들에 대한 정보에 어두워서 일어난 사건이 표전사건이었다고 박원호 교수의 ‘명 초 조선관계사 연구’는 밝혀 놓았다.
1392년 건국한 조선 왕조는 건국 후 503년 동안 명맥을 이어오다 1895년 청과 일본의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국망(國亡)의 길로 들어섰다. 1895년 4월 17일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북양(北洋) 통상대신 리훙장(李鴻章)이 서명한 종전(終戰) 조약의 제1조는 ‘청은 조선이 완전무결한 독립국임을 인정하며, 조공 등 전례는 폐지한다’고 되어 있었다. 조선은 다시 10년 뒤인 1905년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체결한 포츠머스(Portsmouth) 조약으로 국권을 상실한다. 포츠머스 조약의 제2조는 ‘러시아 제국은 일본이 한반도에서 정치·군사·경제적인 이익을 소유하는 것을 인정한다’고 되어 있었다. 조선은 다시 5년 뒤인 1910년 전쟁 한번 벌이지 않고 일본제국에 병합됐다.
조약의 제3조는 ‘대한민국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하며, 오직 하나의 중국만이 있고 대만은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중국의 입장을 존중한다’고 되어 있었다. 제4조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한반도가 조기에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이 한민족의 염원임을 존중하고 한반도가 한민족에 의해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을 지지한다’는 내용도 확인했다.
한반도의 역대 왕조들과 중국 대륙의 역대 왕조들 간 관계는 중국 역사를 지배한 유교 철학에서 나온 화이론(華夷論)과 천하(天下) 체계에 따른 중심과 주변의 관계였다. 중국은 천하의 중심인 중화(中華)이고, 한반도의 왕조들은 변두리에 사는 오랑캐(夷)라는 구조였다. 그러나 2차 대전 종전과 함께 재구성된 국제질서 아래에서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된 대한민국과 1949년 10월 1일 정부가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의 관계는 30년 전쟁 종전 이후 유럽 국가 간 관계를 정립한 1648년 베스트팔렌(Westphalen) 조약에 따른 주권 국가와 주권 국가의 독립적인 관계였다.
유엔 회원국들 사이의 현대적인 국가관계의 기본원칙은 베스트팔렌 조약에 따라 주권 국가와 주권 국가의 관계는 국토의 면적과 인구의 많고 적음, 국력의 강약과 관계없이 대등한 관계라는 원칙이 적용된다. 1992년 8월 24일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에 체결된 한·중 수교 공동성명도 베스트팔렌 조약의 원칙에 따른 현대적인 국제관계다. 천하의 중심과 변두리 사이의 화이론은 이미 과거의 것이다.
대통령실 웹페이지에 따르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15일 페루 리마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만나 자신의 한국 방문 계획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시 주석은 그동안 코로나 팬데믹으로 한국을 방문할 수 없었지만 코로나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되면 윤 대통령의 방한 초청에 기쁘게 응할 것이라고 하고, 상호 편리한 시기에 윤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주기를 희망하였다.” 대통령실이 전하는 시진핑의 말을 분석해 보면 ‘내년 경주에서 개최될 예정인 APEC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니 그전에 윤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주면 좋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한국과 중국은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32년간 1대 1에 가까운 정상(頂上) 방문 관계를 유지해 왔다. 1992년 9월 노태우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고, 1994년 3월 김영삼 대통령 방중, 1998년 11월 김대중 대통령 방중, 2003년 7월 노무현 대통령, 2008년 5월 이명박 대통령, 2013년 6월 박근혜 대통령, 2017년 12월 문재인 대통령 순서로 중국을 방문했다.
이에 대해 중국 측은 1995년 11월 장쩌민(江澤民) 주석이 방한했고, 2008년 8월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부산 APEC 참가차 방한했으며, 2014년 7월에는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방한했다. 두 나라 정상들은 대체로 임기 내에 한 차례 상대국을 방문했고, 베이징올림픽이나 핵안보 정상회의 등 상대국에서 열리는 중요한 국제회의 참가차 방문했다. 상대국 정상과의 회담은 주로 APEC이 열리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였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부주석이던 2009년 12월에도 서울을 방문해서 정운찬 총리와 회담을 한 기록을 남겼다.
두 나라 외교당국 기록에 따르면 한·중 간 정상 방문은 해당 대통령이나 국가주석 임기 내에 한 차례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였다. 시진핑 주석은 부주석 시절에 서울을 한 차례 방문했고, 박근혜 대통령 시기에 국가주석으로서 서울로 정상방문을 한 기록을 남겼다. 따라서 시진핑 주석은 내년 가을 경주 APEC 때 방한하게 되면 세 번째로 방한하는 셈이 된다. 윤 대통령이 내년 경주 APEC 이전에 방중하느냐 이후에 방중하느냐의 문제는 시진핑 주석 방한 기록으로 볼 때 엄격히 따질 필요가 없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은 페루 APEC 참석길에 들른 브라질에서 현지 신문과 서면으로 인터뷰하면서 "한국에 있어 미국과 중국 양국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는 아니다"고 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의 말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는 아니며 특히 중국만을 선택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해야 정확할 것이다. 과거 명과 조공 관계를 맺고 있던 시절에 조선이 명 황제 주원장에게 갑질을 당한 표전사건을 생각하면 미국을 버리고, 중국만을 선택할 일은 결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필진 주요 약력
▷서울대 중문과 졸 ▷고려대 국제정치학 박사 ▷조선일보 초대 베이징 특파원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현 최종현학술원 자문위원 ▷아주경제신문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