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용삐용~ 버스 세워 주세요. 이건 쓰레기차. 쓰레기를 치워주나 봐요."
아치형 철제 책장이 만들어낸 헌책 동굴 사이로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엄마의 정다운 소리가 들린다. 지난 12일 오후 4시경 서울 송파구 잠실나루역 '서울책보고'를 방문한 김모씨(34)는 22개월인 아들 승현군과 함께 어린이집 하원 후에 이곳을 들렀다. 이들은 이곳을 종종 방문한다.
둥근 모양으로 된 철제 서가는 찾은 이를 자연스레 책으로 둘러싸인 터널로 이끈다. 높은 천장까지 책이 쌓여 있어 2단 철 사다리를 가져와야 할 정도다. 책동굴 같은 독특한 구조물은 책벌레를 형상화했다고 한다.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구조 덕에 드라마 호텔 델루나의 할머니 귀신이 등장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생전에 공부 못한 원한이 쌓인 할머니 귀신은 이곳에서 잔뜩 책을 쌓아 놓고 원 없이 공부한다.
서울책보고에는 할머니 귀신이 어렸을 적 출판됐을 만한 책부터 희귀한 독립서적까지 한데 모여 있는 헌책방이다. 1번 '대광서림'부터 33번 '코믹스토리'까지 전국 헌책방이 한 서가씩 차지하고 있다. 아이는 동화책, 젊은 층은 '힙'한 독립서적, 어른은 추억의 서적 등 자신만의 헌책을 찾는 재미가 있다. 성북구에서 이곳까지 찾아왔다는 60대 박모씨는 "최근 어릴 적에 봤던 하이디를 다시 읽었는데 동심으로 돌아간 듯하고, 지금 다시 보니 알프스 산을 배경으로 자연 속에서 할아버지와 어린아이가 순수한 모습으로 서로 교감하는 게 감명 깊다"고 했다.
중년층에게 인기가 많은 서가는 가장 안쪽에 있다. 1990~2010년대 만화책 '댕기' '코믹챔프' 등이 추억여행에 잠기게 한다. 고서가 가득한 '남문서점'도 마주보고 있다. 어두운 적색 겉표지에 '소공자' '사랑의 집' 등 책 제목이 은박으로 음각돼 있다. 뜯겨나간 책 접합부로 노랗게 바랜 속지가 보여 책에 묻은 수많은 손때를 짐작하게 한다.
동네 주민인 50대 전모씨는 6년 전 이 헌책방이 생겼을 때부터 꾸준히 찾고 있다. 전씨는 "서양 근대 소설책을 주로 읽고 있는데, 나이가 들어서 읽으니 더 재밌다"며 "코로나 시기 문을 닫았을 때 빼고는 일주일에 한두 번은 방문한다"고 했다.
온라인 중고 서적 거래가 활성화된 지금 서울책보고 경쟁력은 '추억의 가치'다. 온라인 중고 서점 플랫폼이 최신책을 싸게 살 수 있는 '거래'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곳은 오래된 책을 볼 수 있는 일종의 책 박물관이기도 하다. 서가 맨끝에는 큰 시계 모양으로 된 거울 조형물이 서울책보고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서울책보고에서 가장 비싼 책은 500만원이다. 이 책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독일어판 화보집. 금메달을 목에 건 손기정 선수 흑백 사진이 인화된 실물 그대로가 책에 붙어 있다. 책에 담긴 사회의 정신적 유산에 매겨진 가치다.
6년 동안 이곳을 총괄해온 백민철 비엠컴퍼니 대표는 "고우영 삼국지 전권은 150만원에 팔리기도 했다"며 "헌책이라고 해서 고여 있으면 썩는다. 책이 팔리고 새 책 들어오는 '헌책의 순환'에 따라 사람들도 추억의 가치를 느낄 수 있다"고 자랑했다.
이곳은 원래 잠실철교 아래에 비어 있던 대형 창고였으나 2019년 13만여 권을 소장한 초대형 헌책방으로 재탄생했다.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 있던 25개 헌책방과 전국책방합동조합이 함께 서가를 채웠다. 헌책방과 상생하는 취지에 따라 카드 수수료 등 15% 뺀 수익을 전부 헌책방에 넘긴다.
최근에는 유명 호주 크리에이터가 유튜브 쇼츠에서 서울책보고를 소개해 외국인 방문객이 늘고 있다. 개관 당시에는 호텔 델루나 명성에 힘입어 외국인 관광객 사이에 필수 인증 코스가 됐다. 현재 코로나 팬데믹 이후 주춤했던 방문객 수를 회복해나가고 있다. 올해 9월 기준 방문객 수는 11만3487명으로 처음 개관한 2019년을 제외하고 가장 많았다. 지난해에는 벨기에 한 출판사가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서점 150곳'에 서울책보고를 선정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