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대한 ‘오일머니’를 내세운 중동 국가를 중심으로 반도체 산업 판도가 바뀔지 주목된다. 글로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 1·2위인 TSMC와 삼성전자가 나란히 아랍에미리트(UAE)에 대형 반도체공장 설립 가능성을 타진하면서 더욱 치열해지는 파운드리 경쟁을 예고했다. 특히 반도체 선두 업체인 TSMC를 따라잡을 동력이 필요한 삼성전자가 중동을 거점으로 새로운 활로를 뚫을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23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 경영진 고위 인사가 최근 UAE를 방문해 반도체 제조 복합시설 건립 계획 가능성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자금은 UAE 국부펀드인 ‘무바달라’를 중심으로 UAE 측이 지원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아직 초기 단계지만 만약 해당 프로젝트가 성사된다면 사업 규모는 1000억 달러(약 134조원)에 달할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 측은 이와 관련해 “투자 관련 현황에 대해서는 확인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삼성, 중동 발판 삼아 새 공장 추진하나
대만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 2분기 TSMC의 세계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62.3%로 1위를 차지했다. 1분기 61.7%보다 0.6%포인트 높아졌고 2위인 삼성전자와 격차는 1분기 50.7%포인트에서 2분기 50.8%포인트로 더 벌렸다. TSMC는 기술과 고객 수주 실적에서 삼성전자를 포함한 경쟁사를 압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TSMC와 삼성전자는 이미 미국에서 공장 건설을 구체화하며 경쟁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우선 TSMC는 당초 예정보다 수개월 앞당긴 일정으로 미국 애리조나주에 건설 중인 반도체 공장에서 애플의 모바일용 반도체 생산에 본격 들어갔다. 반면 미국 텍사스주 삼성전자 테일러 공장은 각종 변수들을 만나 진행이 더딘 상황이다. 원자재비·인건비 증가와 더불어 고객사 확보 등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다. 이처럼 공장 완공 시점마저 격차를 벌이며 시장에선 결과적으로 AI반도체 시장 수주 격차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은 현재 미국 내 공장 건설에 대응하기에도 빠듯한 상황이라 중동 거점 진출이 단기간에 이뤄지긴 어려워 보이지만 UAE의 보조금 혜택 등 지원 규모가 압도적이라면 경쟁사보다 먼저 선점하는 것 역시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중동 반도체 공장 건설 프로젝트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풀어야 할 과제가 산적하다. 우선 미국 입장을 고려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미국이 자국 반도체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2022년 ‘반도체법’을 제정하고 보조금 390억 달러(약 52조원)를 반도체 산업에 투입하는 등 글로벌 견제를 이어가고 있어서다. 특히 미국은 UAE에서 생산되는 반도체가 중국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 밖에도 반도체 제조 과정에서 대규모 정제수가 필요하고, 공장 운영을 담당할 UAE 내 전문 인력이 부족해 기술적인 장벽도 문제로 꼽힌다.
시장에선 기반이 갖춰진 한국에서도 반도체 공장 신설이 쉽지 않은데 중동 국가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이 당장은 어려울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재용 회장, UAE와 깊은 인연 “중동, 기회로 가득 찬 보고(寶庫)”
재계에선 AI 투자와 관련해 큰손으로 떠오르고 있는 중동 국가들을 주목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역시 일찍부터 중동 지역을 눈여겨보고 있다. 이 회장은 중동 지역을 ‘기회로 가득 찬 보고(寶庫)’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그는 2022년 10월 회장 취임 후 처음으로 찾은 해외 출장지로 UAE를 택하고 UAE 아부다비 알 다프라주에 있는 바라카 원전 건설 현장을 찾은 바 있다. 설 연휴인 지난 2월에는 UAE를 포함한 중동 국가를 찾아 현지 사업장 점검에 나섰다. 이후 5월에는 한국을 국빈 방문하는 모하메드 빈 자예드 알 나흐얀 아랍에미리트(UAE) 대통령과 만나 재계 총수들과 함께 향후 협력에 대해 논의한 바 있다.
이 회장은 모하메드 대통령과 오랫동안 친분을 쌓아왔다. 2019년 초 모하메드 대통령(당시 왕세제)이 방한했을 때 삼성전자 화성사업장 반도체 생산 라인을 직접 안내했으며, 2021년 12월 초 아부다비 방문 당시에도 만났다. 두 사람 간 인연이 오래 이어진 만큼 양측 간 투자와 기술력에 대한 니즈가 충족되면 반도체 사업 구상에 속도가 붙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