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준의 Indonesia Story] 공급자 중심 시각에 소외받는 디지털 문맹

2024-08-2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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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비약적 디지털 발달 뒤엔 권위주의 그림자

김형준 강원대 문화인류학과교수
[김형준 강원대 문화인류학과교수]



지난 10여 년 동안 디지털화는 인도네시아 사회를 급격히 변화시켰다. 우리 사회도 비슷한 추세를 보였지만, 인도네시아의 변화는 그 속도와 규모 면에서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혁명적이었다. 2010년대 초 인도네시아의 인터넷 이용자는 전체 인구의 10%에 불과했으나 2020년대 초에는 그 비율이 80%에 이르렀다. 디지털 세계에 새로 진입한 인구 규모뿐만 아니라 이들의 인터넷 활용도 역시 주목할 만하다. 2023년 인도네시아 사람의 하루 평균 인터넷 이용 시간은 7시간 38분으로, 우리의 5시간 19분보다 2시간 이상 길었다.
2010년대 후반 이후, 특히 코로나 팬데믹 기간을 거치며 저렴해진 인터넷 접근 비용은 디지털화를 가속했다. 10만원 내외의 비용으로 중국산 저가폰을 구매할 수 있게 되면서 저소득층 역시 부담 없이 휴대폰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거대 통신기업의 독점으로 인해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던 데이터 가격 역시 정부의 강력한 규제 덕분에 급격히 낮아졌다. 최근 인도네시아를 방문했을 때 3000원 정도로 8GB의 데이터를 구매할 수 있었음을 보면 데이터가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공재의 성격을 띠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디지털화는 삶의 모든 영역에 변화를 일으켰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측면은 사람들 간 연결성의 향상이다. 디지털화가 본격화되기 전까지 유선전화 보급률이 10% 미만이었을 정도로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전화 이용은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SNS 사용이 일상화되고 이를 통해 통화가 가능해지면서 이전에 연결되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 네트워크에 편입되었다.

디지털을 통한 연결성 확대는 새로운 경제 활동을 촉진했다. 그중 가장 주목받은 부문은 스마트폰으로 오토바이나 승용차를 호출해 이용하는 승차공유 서비스였다. 토착 기업 고젝(Gojek)은 다국적 기업 우버(Uber)의 인도네시아 시장 진입을 저지할 정도로 성공적인 사업을 운용하며, 인도네시아의 첫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했다. 고젝의 특징적 사업 전략 중 하나는 다양한 영역으로의 서비스 확장이었는데 한때 음식 배달, 마트 구매 대행, 택배, 마사지사와 청소업자 중개 등 10개 이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했다. 고젝은 최근 2조원 가까운 매출을 올리며 인도네시아 제1의 디지털 기업으로서 위상을 확고히 하고 있다.

고젝 사업을 뒷받침한 또 다른 변화는 핀테크의 급속한 확장이었다. 201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신용카드 사용자가 6%에 불과해 이커머스를 뒷받침할 생태계가 제대로 구축되지 않았다. 그러나 강력한 핀테크 지원 정책이 추진되면서 수십 개의 핀테크 업체가 출현했다. 2016년부터 2022년 사이 핀테크 거래는 매년 32% 성장했고, 이용자도 20%씩 증가했다. 특히 코로나 기간 중 정부 주도의 QR코드 결제 방식이 보급되면서 대다수 소매점에서 QR 결제가 가능해졌고 디지털 인프라가 더욱 공고해졌다.

한 달 전 인도네시아 방문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디지털화의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접한 상황은 입국 비자 신청 때였다. 공항에 도착해 긴 줄을 서야만 받을 수 있었던 도착 비자를 이제는 인터넷으로 신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인도네시아 국내선 철도 역시 스마트폰 앱을 통해 예약이 가능해졌다. 이민청 직원과의 실랑이나 철도 역사에서의 긴 줄은 내가 오랫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인도네시아의 모습이었는데, 디지털화는 이를 단번에 바꾸어 놓았다.

인도네시아에 도착한 후 디지털화의 영향을 더욱 쉽게 느낄 수 있었다. 공항에서 고젝 앱으로 승용차를 부를 수 있게 되면서 요금을 둘러싼 택시 운전사와의 흥정, 먼 길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과거의 추억이 되었다.

자정이 지나 도착한 호텔에서는 룸서비스를 시킬 수 없었다. 하지만 고젝 앱을 켜자 수십 개의 음식 배달 옵션이 나타났고, 주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배달되었다. 며칠을 현지에서 지내면서 디지털화가 먼저 시작된 우리나라와 별 차이 없는 편리함을 경험할 수 있었다. 3차 산업혁명 이후 오랫동안 존속해왔던 선진국과 인도네시아 사이의 넘을 수 없던 격차가 4차 산업혁명 이후 급격히 축소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디지털화가 가져온 긍정적 변화를 느끼고 이용하는 일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그 이면에 있는 어두운 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실마리를 제공한 사건은 호텔에서 벌어졌다. 내가 묵던 곳은 비즈니스급 호텔이었는데 객실에는 전화기 대신 태블릿이 비치되어 있었다. 처음 객실에 들어섰을 때 이 태블릿을 보며 인도네시아 서비스 업계의 빠른 디지털 전환 속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호텔 프런트에 연락할 일이 생겼다.

태블릿의 첫 화면에는 QR코드를 스캔한 후 “구글, 프런트에 연결해 줘”라고 영어로 말하라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설명에 따라 스캔하고, 스마트폰을 향해 프런트에 연락해 달라고 말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내 영어 발음이 나빠서 구글이 알아듣지 못하는 걸까 하는 생각에 또박또박 다시 말해봤다. 몇 차례 시도했지만 어떤 결과도 얻지 못하게 되자 짜증이 몰려왔다. 그러나 상황을 해결할 뾰족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10여 분간 태블릿과 씨름한 끝에 결국 선택한 해결책은 프런트에 직접 찾아가는 것이었다. 복도를 걸어가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무엇이 잘못됐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디지털 리터러시가 부족한 나 자신이 문제인 듯도 했고, 전화기를 없애버려 불편을 초래한 호텔이 문제인 듯도 했다.

디지털화의 문제점을 더욱 명확하게 인지하게 된 사건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했다. 인도네시아 철도청 앱을 통해 기차를 예약한 후 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출발 날짜를 잘못 선택했음을 알게 되었다. 예약을 취소하고 환불을 받고자 앱을 살펴보았지만 관련 버튼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디지털 활용에 익숙하지 않은 나 자신을 탓해야 하는 순간이 다시 온 듯했다. 주의 깊게 앱을 살펴보아도 환불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직관적으로 문제 해결 방식을 찾는 대신 작은 글씨로 쓰인 글을 읽기 시작했고 마침내 환불 규정을 발견했다. 놀랍게도 앱에는 환불 기능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고 이를 위해서는 기차역을 직접 방문해야 했다.

우리의 코레일 앱에 비견될 정도로 사용자 친화적으로 만들어진 인도네시아 철도청 앱에 환불 기능이 설치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기술적 문제로 치부될 수 없었다. 거기에는 분명히 일정한 의도성이 개입되어 있음이 확실했다. 즉, 환불을 어렵게 만들어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자 귀찮음을 무릅쓰고라도 이 문제를 파헤쳐 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겼다.

기차역 창구에서 예매 취소 사실을 알리고 환불을 요청하자 역무원은 흔쾌히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느낌도 들었지만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그가 건넨 서류를 창구 한 귀퉁이에 서서 채워나갔다. 환불이라는 행위와 비교해보면 과도할 정도로 큰 노력을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서류를 제출하자 역무원은 빈칸을 지적하며 이를 채우도록 요구했다. 환불받을 계좌 정보였다. 그러나 현지 은행 계좌가 없는 나로서는 이는 채우고 싶어도 채울 수 없는 항목이었다. 사정을 말하자 그는 전자 지갑을 언급했지만 이 역시 계좌 없이는 만들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외국인임을 뻔히 알면서도 규정을 읊어대는 역무원의 태도가 곱게 비칠 리 없었다. 하소연하듯 시작한 내 말은 점점 공격적으로 변했고, 목소리 톤 역시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상황이 전개되자 내가 소란을 마다하지 않는 외국인임을 인식하게 된 역무원의 태도가 달라졌다. 그는 현금 환불 가능성을 알아볼 테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창구 뒤편 보이지 않는 사무실로 들어갔다가 돌아온 그는 25%에 달하는 수수료를 공제한 현금을 내게 내밀었다. 그러면서 현금 환불이 나를 불쌍히 여겨 그가 제공해 준 호의이며, 앞으로는 앱 사용을 조심하라는 당부를 덧붙였다.

환불이 가능했던 이유는 내가 현지어를 구사하고 현지 상황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는 훨씬 더 괴롭고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지난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외국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닌데 디지털화가 시작되기 전 인도네시아의 모습은 이를 예시한다. 인도네시아 공공기관의 민원 처리 방식은 거의 전적으로 공급자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민원인에게 여러 서류를 제출하게 하고 복잡한 절차를 거치게 함으로써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현지인들은 담당자에게 호의를 구걸하듯 요청하거나, 인맥을 이용하거나, 급행료를 내야만 민원을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환불 과정 하나만으로 전체를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이 경험은 공급자 중심의 편의주의적 경향이 디지털화 방향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시사한다. 앱의 구성이 사용자보다 공급자의 이익과 편의에 맞춰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를 조금 더 확대하면 민주화가 진행되고 있음에도 인도네시아 정부의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이 디지털 세계에 적용되고 있다는 해석을 도출할 수 있다. 일반인을 통제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이들 위에 군림하려는 경향이 디지털 환경에서도 일정한 변형을 거치며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기기를 사용할 수 없으면 서비스를 이용하지 말라는 식의 접근은 비단 인도네시아만의 상황이 아니며 우리를 포함한 다른 국가에서도 나타난다. 이는 디지털 격차를 무시하고 소외 집단에 대한 배려를 간과한 결과이며 공급자 중심적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찾을 수 있던 이러한 모습은 권위주의적 성격의 정부를 상기시켜 주었다. 디지털 기술 자체는 중립적이지만 그 활용 방식은 사회의 민주화 정도와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음을 인도네시아 사례는 보여주었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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