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기술은 지문보다도 더 강한 흔적을 남긴다. 개인 동선 취향 등 동태 파악에 중요한 단서를 누구의 먹잇감이 될는지도 모른 채 즉각 남기고 다니는 까닭이다. 그것도 영구적으로. 이 특성이 부인불가성을 가능케 해준다. 증거가 어딘가 남아 있기 때문에 훗날 결코 부정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영화 ‘태양은 가득히’에서와 같은 완전 범죄가 통하지 않는다. 디지털 포렌식으로 못 잡아내는 건 없다고 보면 된다. 사회에서 부정 부패를 없애 사회를 정화시키는 데 있어서는 디지털 순기능으로 작용한다.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하면 투명성을 한층 더 증대시킬 수 있으나 블록체인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왠지 모르게 가상화폐를 먼저 떠올리게 되면서 부정적 선입관이 작용하여 그런 좋은 기술을 일상 속에 받아들일 준비도 안 돼있는 편이다. 지자체들마다 앞다투다시피 하면서 현금 없는 버스 서비스를 디지털 전환 사례로 소개하면서 시범 서비스에 들어가 일부 시민들의 큰 반발을 사고 있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이란 사회 속에서 부정부패의 고리가 조성될 기미를 선제 차단하여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중대하며 거기엔 어느 누구의 반발도 있을 리 없다. 그러므로 공공 정책개발과 결정에는 그런 중대한 부분들을 발굴해내는 선제 노력이 필요하다.
좋은 후보의 하나가 가상화폐 코인 시장 쪽이다. 작년 이맘때 코인이 개입된 자금세탁 의혹을 불러일으킨 어느 공직자 사건은 별도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경향신문 2024년 5월 12일자, 조선일보 5월 17일자). 우리나라 금융계 FBI 격인 금융정보분석원(FIU)에서 이상거래 색출 컴퓨터 시스템에 의해 기계적으로 자동 포착된 케이스가 그것이다. 참고로 그 시스템은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게 애초부터 설계돼 있다. 포착 후 혐의가 농후한 경우에 한해 검찰에 수사 요청하는 게 통례다. 자동 검출된 경우 10분의 1 정도가 검찰로 이관된다. 그 의원은 이 순서에 따라 검찰로 넘겨졌다. 그러나 이관 후 검찰이 지지부진한 행보를 보인 일은 불가사의 중 하나다. 또한 검찰 수사에 앞서 그 정도 규모의 사건이면 의혹 하나만으로도 당장 자신이 국민 앞에 직접 정치계 퇴장 기자회견을 자청해야만 할 일이었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그런 회견이 많다. 그러나 그 의원은 오히려 무슨 법을 어긴 게 있냐고 항변하며 의원실을 떠나 있더니 수개월 뒤 탈당에 들어갔고 최근에는 복당하는 일련의 행보를 보였다. 총선에서 야권이 승리한 까닭일까. 우리가 얼마나 정치 및 사법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지에 대해 더 이상 긴 설명이 필요 없는 대목이다.
바로 그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공직자 대상 가상자산거래 신고법이 여야 만장일치로 국회에서 통과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법에 빠져나갈 여지를 주는 허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최근 몇 년간의 동태를 살펴보면 이렇다. 2024 총선 과정에서 여당 국민의힘은 가상자산에 대한 과세 시점을 가상자산기본법 시행 이후로 유예하자는 방침을 정했다. 당초 가상자산에 대한 과세는 2023년부터 시행됐어야 했지만 시스템 정비와 투자자 보호 제도 마련을 이유로 1년 미뤄졌고, 금융투자소득세 시행에 맞춘다며 더 유예돼 내년 2025년으로 연기된 상황이다. 2년 전 논의 때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도 과세 신뢰도와 형평성을 고려해야 한다면서 투기성 자금을 막고 투자위험을 줄이기 위해 조속한 과세가 필요하다고 밝혔으나 아직껏 그대로 지켜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렇듯 우리의 뒷북치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가상화폐 거래 규모가 큰 국회의원의 코인 거래 액수가 단기간에 1000억원이 넘을 정도로 추산됐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그대로 용인된 채 넘어갔다. 거래액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역시 불법으로 코인 거래한 의원이 무려 12명이나 된다. 그들도 물론 현재 모두 면죄부를 받은 상태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영·미에서는 불가능한 이런 범죄행위가 어떻게 한국에서는 가능했을까. 단적으로 2018년 비트코인 광풍이 불 때 선진국처럼 그 당시 시차 없이 바로 입법 제정하지 않은 탓이다. 코인 광풍과 발맞춰 가상자산공직자신고법과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을 제정한 나라는 영·미뿐이 아니다. 일본과 싱가포르도 있다. 그들은 디지털 기술에 대한 이해가 앞서 그런 기술들을 입법에 적극 활용하여 완벽한 법을 갖추는 데 성공했다. 우리도 지체없이 전방위적으로 선제 입법을 통해 잠재적 부정 거래행위를 차단했더라면 소위 김치코인이라는 로컬 코인이 무분별하게 난립하는 일조차 없었을 것이다. 또한 국내거래소가 전 세계에서 코인가격 조작 독무대로 불명예 낙인이 찍히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경우는 가상자산신고법 자체가 2022년 1월 이후 코인 거래에 대해서만 당국에 신고하게 돼있어 그 시점 이전 거래에 대해서는 실질적으로 눈감아주는 꼴이 된 게 가장 큰 한계다. 자금 세탁 의혹 당사자인 국회의원의 경우 대부분의 코인거래를 2021년과 그 이전에 종료한 것으로 드러나 그 의원을 포함한 다수 공직자의 과거 코인거래를 사실상 소급하여 묵인해준 결과가 됐다. 그런 법을 뒤늦게 도대체 뭣하러 만들었냐는 말이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이 정도면 오히려 공직자 면죄부법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이미 해외 검은 코인 세력의 놀이터로 변모한 국내 가상화폐거래소에서 코인 거래가 이루어질 때 가장 큰 손해를 볼 투자자는 작은 손, 즉 소위 개미들이 될 수 있다. 이런 가상자산 이용자를 보호하기 위한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도 역시 국회를 통과했지만 내년 7월에나 가서야 시행될 예정이라 코인 투기꾼들로 하여금 가상자산법 시행 전 제도의 시간상 공백을 노려 충분히 한탕 할 수 있는 여지를 주고 있다. 가상자산법의 또 다른 허점은 국내거래소와 해외거래소 간 코인 전송을 막을 방법이 실질적으로 없어 국내 시세 조작 세력이 해외 시세 조작 세력과 결탁하는 날에는 개미들의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탕 시나리오를 가능하게 해주는 허점은 군데군데 박혀 있다. 그런 교묘한 내막은 이렇다. 시세조작 세력이 코인 계정 몇 개만 가지고도 자기들끼리 코인을 사고파는 자전거래를 발생시켜 코인 가격 요동을 야기한 다음 가격 상승 틈을 타 코인 물량을 털어내면 코인 가격을 상당 수준으로 폭락시킬 수 있다. 이 다음 가격 최저점에서 싼값에 재매수한 다음 해외거래소로 전송하면 해외 현지에서 코인 가격 조작을 거쳐 다시 국내거래소로 코인 유입이 가능해진다. 그후 국내거래소에서는 또다시 검은 세력끼리 자전거래를 통해 다시 가격 급등에 이어 급락, 재매수, 해외거래소로 다시 전송할 수 있는 악성 사이클이 드디어 완성된다. 이런 사이클이 계획적으로 무한 반복해서 벌어지더라도 코인거래소나 코인 거래 감독 당국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고작해야 소수 계정에 의한 거래 집중과 이상 급등만 관망할 뿐 실제로 제동을 걸 방법과 권한이 전혀 없다. 더구나 해외 거래소에서 국내 거래소로 코인을 옮기는 데에는 상당한 시차가 존재하기 때문에 시세를 조작하는 시간 동안은 코인거래 감독당국이나 제3자에 의해 간섭 받을 확률도 낮아진다. 요약하면 모두가 선제 대응 안 했기 때문에 빚어지는 참사다. 이런 시세조작 검은 내막을 훤히 꿰뚫어 보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따라서 국민의 대표답게 머리 좋다는 국회의원들이 왜 선제 대응 안 했는지에 대해서도 의심 가는 정황이 사실 한두 가지가 아니다.
또 다른 디지털 기술 외곽지대 대표 중의 하나가 대선이나 총선 투표의 경우다. 우리나라의 투표 광경을 보면 투표 방식의 획일화가 두드러진 특징이다. 다양한 투표 방식을 허용하는 선진국과 매우 대조적인 부분이다. 우리는 투표 시 거동이 불편한 유권자에게 대해서도 반드시 투표장에 가지 않으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게 돼있지만 선진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배려의 차원이 다르다. 국내거주자라 할지라도 거동 불편자에 대해서도 마치 해외 주둔 군 인력 수준급에 해당하는 처우를 적용한다, 원격 우편 투표는 물론 이메일 투표까지도 허용하고 있다. 만일 우리나라에서 그런 식으로 한다면 과연 어떤 반응이 나올까. 그건 시기상조라 말도 안된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라면 한국 사회 투표 관행이 획일적인 사회주의 체제 국가 관행과 과연 어디서 어떻게 다르다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볼만한 대목이다. 보안을 위해 이메일 투표에서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하여 투표 신뢰도를 기하는 방법도 선진국 투표의 특징이다. 디지털 기술을 선택지 확대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경우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우리같이 현금 없는 버스 식으로 선택 폭을 축소화하는 방향과는 근본적으로 철학이 다른 것이다. 유권자가 됐든 탑승자가 됐든 우리가 결정적으로 부족한 부분은 디지털 기술과 관련된 배려 정신이다. 전자는 디지털 기술 활용의 사각지대, 후자는 역으로 디지털기술 남용의 사각지대에 해당한다.
우리가 선진국 따라가기도 바쁜데 생각의 속도와 유연성에서 차이가 난다면 선진국과의 거리는 그만큼 더 멀리 벌어지는 것 아닐까. 총선 결과 국회의원의 대다수가 법조인으로 채워졌다. 판사 검사 변호사 출신이 무려 61명에 달한다. 디지털 트렌드에 조예가 있는 이는 소수일 것이다. 정보기술 IT 전문가도 총선 결과 모두 7명에 불과하여 법조인 수의 10분 1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이래서는 입법을 주도하는 국회가 급변하는 IT 기술을 이해할 방법이 없고 따라서 영·미처럼 선제 대응할 방도도 없다. IT 전문가를 국회의원으로 적어도 30명 정도는 보유하고 있어야 뒷북치는 입법활동을 겨우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향후에는 이에 대해 여야가 같은 생각을 갖고 특히 비례대표 인선에 임하지 않고는 전방위적 입법을 펼치는 선진국의 의정 철학을 따라가기 불가능할 것이다. 지금 같은 위성정당식 비례대표로는 어림도 없다.
문송천 필자 이력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교수 ▷미국 일리노이대(어바나 샴페인) 전산학 박사 ▷유럽IT학회 아시아 대표이사 ▷대한적십자사 친선홍보대사 ▷카이스트·케임브리지대·에든버러대 전산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