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증시가 미국 증시 주도주에 휘둘리고 중국 증시에 추격당하는 '샌드위치' 신세로 전락했다. 코스피 시총에서 25%를 차지하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메모리반도체 기업 주가는 인공지능(AI) 반도체 대장주 엔비디아와 협력 여부로 출렁이고 있다. 정부 주도로 자본시장 경쟁력 강화에 나선 중국은 이제 막 밸류업에 나선 한국을 따라잡을 기세로 해외 자본을 끌어들이며 호응을 얻고 있다. 증권가에선 하반기 이후 입법부 주도로 전환하는 시장 상황에서 산업정책과 수출구조 변화를 고려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4일 글로벌 투자정보 사이트 '인베스팅닷컴'에 따르면 AI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는 3일(이하 현지시간) 미국 나스닥에서 전 거래일보다 53.67달러(4.89%) 오른 1149.99달러로 마감했다. 지난 5월 29일 달성한 기존 52주 신고가(1148.25달러)를 또 돌파했다. 주가는 시간 외 거래에서 한때 4.65달러(0.40%) 더 올라 1154.64달러에 이르렀다. 엔비디아는 앞서 10분의 1 액면분할 계획을 예고했는데, 주주들로서는 보유 주식 총액을 유지하면서 수량은 10배로 늘고 1주 거래 가격은 10분의 1이 된다. 거래 부담이 줄어 통상 주가에 호재로 작용한다.
엔비디아는 앞서 '블랙웰' 후속 칩인 '블랙웰 울트라'를 내년에 출시하고 내후년 '루빈'이라는 차기 플랫폼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시장조사업체 프레시던스리서치에 따르면 AI 반도체 소비처인 '글로벌 AI 하드웨어' 시장은 작년 150억4000만 달러에서 올해 187억 달러로 증가하고 2033년에는 1286억9000만 달러 규모로 급성장할 전망이다. 전 세계 산업계에 생성 AI 서비스와 기술 도입을 위한 투자 움직임이 들불처럼 확산하면서 2년 뒤에도 기술 주도권을 이어갈 청사진을 내건 '엔비디아 모멘텀'이 국내 증시에 지속해서 작용할 전망이다. 반도체와 후방산업 생태계 비중이 큰 국내 증시는 일단 수혜를 보겠지만 증시 밸류업 관점에선 해외 혁신기업 영향에 따른 리스크를 상쇄할 자체 역량이 필요하다.
코스피 시총 1·2위를 나란히 차지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사실상 엔비디아에 울고 웃는다. 엔비디아에 5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3E)를 독점 공급하는 SK하이닉스 주가는 사상 최고가를 경신하고 있지만 삼성전자는 '엔비디아 테스트 통과에 실패했다'는 외신 보도가 나온 후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미국 빅테크에 종속됐다는 얘기가 나온다.
미국 증시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중국 밸류업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지난 4월 29일까지 상하이종합지수가 연초 대비 5% 이상 올랐고 선전종합지수도 2% 넘게 올랐다. 본토와 홍콩, 글로벌 기업을 다수 편입한 항셍지수도 6% 가까이 상승했다. 국내 주가연계증권(ELS) 기초자산으로 쓰여 폭락에 따른 대규모 손실이라는 쓴맛을 안긴 'H지수'도 11% 상승해 괄목할 만한 오름세를 기록했다. 기업 자율성에 방점을 둔 국내와 달리 중국 정부는 밸류업 일환으로 기업들에 배당을 강제하고 나섰다.
중국 관영매체인 증권보는 지난 3일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UBS 등이 중국 지수 목표가를 올리고 본토 주식 매수 의견을 내놓고 있다고 보도했다. 글로벌 자산운용사 얼라이언스번스타인은 자본금을 3억 위안으로 기존 대비 1억 위안 늘린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외국인 투자자는 올해 들어 5월까지 중국에서 830억2300만 위안(약 15조7500억원) 순매수를 기록했다.
하인환 KB증권 연구원은 "외국인이 역대 1~5월 코스피 합계 순매수 중 최대 규모인 20조원 순매수를 기록했는데 한국 증시 밸류업 기대감을 충족시키면 추가 자금이 유입되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언제 빠져나갈지 모른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하 연구원은 "세법, 상속세제, 상법 등 개정 시 입법부 동의 여부 등 법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여부가 밸류업 성공 여부를 좌우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