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리로 인한 경기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부자들이 앞다퉈 부채를 줄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 같은 불황기에는 과감한 투자보다 부채를 줄이면서 안정적인 자산 포트폴리오를 유지하는 부자가 대다수인 것으로 파악된다.
9일 금융권 등에 따르면 지난해 부자들이 급격히 부채를 줄였다. KB금융그룹의 KB경영연구소가 발간한 '2023 한국부자보고서'에 따르면 금융자산 10억원 이상을 보유한 부자들의 평균 부채 규모는 지난해 말 기준 4억8000만원으로 지난 2022년 7억1000만원 대비 32.39% 줄었다.
이 기간 우량 기업도 적극적 부채를 상환해왔다. 지난해 국내 유가증권시장에서 금융사를 제외한 시가총액 상위 10대 기업의 부채비율(개별 기준)은 71%로 2022년 75.7% 대비 4.7%포인트(p) 개선됐다.
부채비율은 기업이 보유한 자산 중 부채가 어느 정도 차지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비율로, 기업의 재무구조를 살펴볼 때 활용하는 대표적인 지표로 꼽힌다. 결국 개인과 기업 모두 부자들은 지난해 부채를 줄이는 편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는 지난해 1월 한국은행이 국내 기준금리를 3.5%까지 상향 조정한 것과 큰 연관이 있다. 지난해 초부터 이자 부담이 매우 커지면서 부채를 활용한 레버리지 효과로 수익을 극대화하는 것보다 부채를 상환하는 편이 낫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이다. 반면 지난 2022년 연초 기준금리가 1.25%로 지난해보다 훨씬 이자 부담이 적었다.
아울러 지난해 경기 불황이 지속되면서 국내 부자들이 신규 투자를 진행하기보다는 기존 자산 포트폴리오를 유지하면서 부채를 줄여 리스크를 해소한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해 하나금융경영연구소가 하나은행 고객 21명을 인터뷰하고, 금융자산 10억원 이상을 보유한 745명을 온라인 설문조사한 결과를 '2023년 대한민국 웰스리포트'를 통해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부자의 81%가 지난해 경기 악화가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당시 95%의 부자들이 지난해 부동산 경기가 더욱 악화하거나 2022년 수준과 비슷할 것이라고 봤다. 2022년 시작된 금리 인상 등으로 시작된 부동산 매매가격 하락세가 지난해 내내 이어질 것이며, 지금보다 5~30% 가량 추가 가격이 하락할 것이란 의견이 82%에 달했다.
보유한 자산 중 부동산의 비중이 55% 이상인 국내 부자들 입장에서는 5% 이상 가격이 떨어질 것으로 보이는 부동산을 매입하기보다는 부채를 줄여 향후 호황을 대비하는 전략을 취한 것으로 분석된다.
다만 국내 부자들이 올해도 이 같이 부채 상환 전략을 지속할지 알 수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경기가 바닥까지 내려왔다는 인식이 확산된다면 국내 부자들이 부채 상환보다 부동산 등 자산 투자로 돌아설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부자들이 예측하는 부동산 상승 전환 시점은 '2025년 이후'가 37%로 가장 많았다. 이후 '2024년 하반기'(26%), '2024년 상반기'(24%), '2023년 하반기'(12%) 순으로 집계됐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발표된 '2023년 대한민국 웰스리포트'에서도 올해 부동산 경기에 대한 부정적 전망이 67%로 아직 높았으나 긍정적인 전망도 33%로 지난해 16% 대비 15%p 크게 늘어나 인식의 전환 조짐을 보였다. 실물 경기에 대해서도 부자들 63%는 여전히 부정적이라는 답변을 했으나 지난해 조사 대비 16%p 낮아져 회복세를 예상하는 의견이 상당히 늘었다.
이 같은 경기 예측을 기반으로 2024년 자산 포트폴리오 조정 계획을 물어본 결과, 부자 10명 중 7명이 '지난해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응답했다. 지난해 조사에서 10명 중 5명 이었던 것과 비교해 관망세로 돌아선 부자가 더 늘어난 셈이었다. 다만 조정 계획에서 '지난해 대비 금융자산을 늘리겠다'고 답한 부자는 줄었으나 '부동산을 늘리겠다'고 답한 부자는 소폭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하나금융연구소 관계자는 "부자 10명 중 9명이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는데, 2024년 보유 부동산 매도 의향보다 매수 의향이 더 높았다"며 "매입 의향이 있는 부동산은 중소형 아파트와 토지 등의 선호도가 높았고 대형 아파트에 대한 선호는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