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는 20살이고, 대학교 2학년에 재학 중입니다. 고향은 뤄양인데, 현재 정저우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습니다. 제가 찾는 남자친구 조건은···.(생략)"
무대 위에 올라온 한 여대생이 1000여명이 넘는 관중 앞에서 나이, 주소 등 개인 신상정보를 이야기하자 관객들이 환호한다. 여대생이 마음에 든 남성 4명이 무대 위에 올라온다. 각자 개인 신상을 소개하면, 여성은 마음에 드는 남성을 선택한다. 두 사람은 현장에서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웨이신(위챗 중국 버전) 친구 추가를 한 뒤 서로 손을 잡으며 무대에서 내려온다.
전국각지 청춘남녀 몰려오는 ‘짝짓기 성지’
이 공연의 사회를 맡은 건 왕포, 왕씨 할머니를 맡은 61세 자오메이(趙梅)다. 왕포는 과거 송나라 시대 혼란상을 그린 소설 ‘수호지’에 나오는 중매쟁이다. 송나라 수도가 바로 이곳 카이펑이었다.‘왕포숴메이’ 공연은 이곳 관광구내에서 자오메이를 비롯한 배우들이 송나라 때 의상을 차려입고 고대 중매 문화를 재현하는 일종의 전통 역사문화극으로 시작했다. 공연 도중 관객들이 직접 무대에 올라와 고대 남녀의 연애를 체험하는 코너가 있었는데, 그것이 올 들어 인기몰이를 하면서 왕포숴메이 공연은 아예 젊은 남녀가 현장에서 즉석 만남을 갖는 '짝짓기 무대'로 발전했다. 자오메이의 재치 있는 입담, 흥미진진한 짝짓기 현장 등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유명세를 타며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특히 왕포숴메이는 고스펙을 가진 선남선녀 위주의 TV 짝짓기 프로그램과 달리 평범한 갑남을녀의 실질적인 사랑과 연애 욕구를 채워준다는 점에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하루에 오전, 오후 2번 열리는 왕포숴메이 공연마다 수천명의 관객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룬다. 특히 젊은 남녀들은 왕포의 ‘선택’을 받아 무대에 오르기 위해 공개 구혼 플래카드를 들거나, 호루라기를 불고 구호를 외치는 등 적극적이다.
무대에 올라 웃통을 벗고 몸매를 과시하는 남성, “너로 할래”라고 말하며 당당하게 마음에 드는 남성을 고르는 여성, "잘생기고 돈 많은 남자가 좋아요"라고 솔직하게 외치는 여성까지. 온갖 조건을 따지느라 바쁜 현대사회에서 사랑을 쟁취하려 용기를 내는 젊은 남녀의 모습이 관객의 환호를 받고 있다.
이 공연은 인플루언서 등을 통해 동영상 플랫폼에서 라이브 방송으로도 방영되는데 현재까지 누적 방영 횟수만 80억건에 육박한다. 라이브 방송 댓글에는 자신의 신상과 사진을 공개하는 누리꾼의 공개 구혼 내용이 수도 없이 달린다. 공연이 인기를 끌면서 왕포 역의 자오메이도 유명 인사가 됐다. 중국 숏폼(짧은 동영상) 플랫폼 더우인에서 그의 팔로어 수는 3월 15일 23만명이던 것이, 4월 9일 현재는 645만명을 돌파해 한달도 안되는 사이에 30배가 뛰었다. 카이펑시 문화관광 대사라는 별명도 얻었다.
덕분에 카이펑은 올해 중국 대륙에서 가장 ‘핫’한 관광도시로 떠올랐다. 중국 최대 온라인여행사 트립닷컴에 따르면 3월 18일부터 31일까지 2주간 카이펑 시내 관광지 입장권과 호텔 예약건수는 직전 주 대비 30% 이상씩 급증했다. 특히 4월 초 청명절 연휴(4~6일) 사흘간 카이펑 전체 관광지 예약량은 전년 동기 대비 7배 이상 뛰었다.
지난달 29일 카이펑 시정부는 문화관광업무 회의에서 '왕포숴메이'의 성공 사례를 극찬하면서 현재의 관광 열기가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도록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방안을 연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완쑤이산 관광구가 속한 룽팅구 정부는 이달부터 현지 공공기관 주차장을 외지 차량에 무료로 개방하고, 외지 차량이 경미한 교통법규를 위반했을 경우에 처벌을 면제해 주는 등의 외지 관광객을 대상으로 각종 우대 조치를 내놓기도 했다.
결혼 기피하는 청춘들…왕포에 열광하는 이유
중국 국가통계국에 따르면 2022년 말 기준 중국의 15세 이상 싱글(미혼) 인구는 2억4000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17.14%를 차지한다. 2022년 중국에서 혼인한 부부는 모두 683만5000쌍으로, 전년 대비 10% 이상 급락하며 9년째 감소세를 이어갔다. 혼인율도 4.8‰(‰=퍼밀, 1000분의1)로, 전년 대비 0.6‰포인트 하락했다.
이처럼 최근 중국 경기 둔화로 실업률이 치솟고 미래가 불확실한 청년들이 결혼은커녕 연애도 기피하면서 혼인율이 낮아지는 가운데, 이러한 짝짓기 공연이 유행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일부 중국 관영매체는 왕포숴메이 인기 현상을 적극 띄우며 제2, 제3의 왕포숴메이를 만들어 사랑·연애 결혼에 대한 젊은 층의 관심을 이끌어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산하 뉴미디어 '인민일보 평론'은 “중매쟁이의 뛰어난 입담과 유쾌한 현장 분위기는 '주선자'와 '애프터 신청' 등에 얽매여 다소 경직되고 어색한 소개팅 분위기와 다르다”며 “스펙을 보지 않고 누군가에 한눈에 반할 수도 있다는 낭만과 용기로 진실된 사랑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한다”고 분석했다.
특히 현대사회 생활에서 받는 스트레스, 좁아진 인간관계, 물질적 비용 부담 등으로 연애·결혼에 대한 의지를 상실한 젊은 청춘에게 사랑을 향한 열망을 신선하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도 분석했다.
펑카이핑 중국 칭화대 사회과학대 학장은 중국 관영매체 환구시보에 “왕포숴메이의 인기는 청년들이 여전히 사랑을 갈구하고 있으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짝을 찾길 원한다는 것을 모여준다”고 해석했다.
다만 최근엔 왕포숴메이 공연에서 짝을 찾은 한 남성이 알고 보니 결혼을 한 유부남이라는 속인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심지어 일부 누리꾼은 미리 각본을 짜서 남녀 짝을 정해놓고 하는 공연이 아니냐는 의혹도 나왔다. 이에 심리적 부담감을 느낀 자오메이는 한 달간 공연을 쉬겠다고 선포하기도 했다.
각종 논란 속 왕포숴메이 공연은 자오메이 대신 다른 여성이 진행하고, 무대에 올라 짝을 찾으려는 남녀는 미리 실명제로 사전 예약해 기혼남녀의 참여를 막는 등의 규율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한편 왕포숴메이 인기에 힘입어 최근 중국에 ‘중매 경제’가 뜨고 있다. 중매, 연애, 결혼 등을 테마로 한 카페가 생겨나고 있는 게 대표적이다.
중국 매체 36kr에 따르면 허베이성 스자좡에 최근 '웨딩 카페'가 오픈했다. 전직 웨딩플레너 장씨가 운영하는 이 카페는 메뉴 이름부터 '짝사랑', '첫사랑'에서부터 '7년차 부부 권태기', '금혼식' 등 다양하다.
단순히 음료만 파는 것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싱글 남녀가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게임이나 행사를 주최하기도 하는데, 월 매출만 20만 위안(약 3740만원)에 달한다고 한다. 장씨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현재까지 모두 18쌍의 커플이 이곳에서 만나 결혼했다. 그는 '중매 경제'가 뜨면서 카페 체인을 낼 계획이며, 올해 15개 매장, 내년엔 50개 매장을 개점할 것이라고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