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웨이는 전기차를 직접 만들지 않는다. 오직 제조사가 좋은 차를 만들 수 있도록 기술을 지원할 뿐이다."
세계 최대 통신장비업체 화웨이의 전기차 사업 공식 모토다. 차를 직접 만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화웨이는 기술력만 가지고 올 들어 중국 전기차 시장의 다크호스로 부상했다.
화웨이가 중국 자동차 제조업체 싸이리쓰(賽力斯, 세레스·SERES)와 공동 개발한 전기차 브랜드 '원제(文界, 아이토·AITO)'는 올해 1~2월 누적 판매량만 6만대를 돌파하며 중국 신흥 전기차 1위로 올라섰다. 3월에도 거침없는 판매 증가세를 이어가는 중이다.
화웨이 후광 효과에 싸이리쓰 주가는 2020년 말 10위안 미만이던 것이 현재는 10배 가까이 오르는 등 거침없는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적자난' 싸이리쓰···화웨이에 ‘영혼’ 팔아 성공?
화웨이와 싸이리쓰의 협력이 처음부터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싸이리쓰는 사실 적자에 허덕이던 무명의 자동차 제조업체였다. 2019년부터 화웨이와 전기차 방면에서 협력한 이후에도 적자난은 지속됐다. 2020년부터 2023년까지 누적 적자액만 100억 위안(약 1조8537억원)이 넘었다. 그런데도 싸이리쓰는 화웨이와의 협력을 계속 이어갔다. 화웨이 역시 “화웨이 폰은 사고 싶은데, 화웨이 카는 별로 사고 싶지 않다”는 소비자들의 냉소적인 반응도 견디며 자동차 사업을 밀어붙였다.
사실 현재 화웨이와 전기차 방면에서 협력하는 업체는 많다. 화웨이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자동차 제조업체와 협력하고 있다. 첫째는 화웨이가 자체 개발한 커넥티드카 시스템인 하이카(Hicar) 솔루션을 탑재하는 방식이다. 하이(Hi)는 화웨이 인사이드의 줄임말로, 화웨이 기술이 적용됐다는 뜻이다.
둘째는 훙멍즈싱(鸿蒙智行, HIMA)이라 불리는 일종의 화웨이 스마트차 기술에 기반한 기술생태계 동맹을 맺는 것이다. 하이카보다 한층 더 깊이 협력하는 방식으로, 화웨이가 직접 차량 디자인, 엔지니어링, 기술 솔루션, 판매까지 맡는 것이다. 자동차 제조사는 화웨이 요구에 맞춰 전기차를 생산하는 사실상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공장과 다를 바 없다. 그만큼 화웨이의 영향력이 지배적이다. 화웨이와 싸이리쓰의 협력은 바로 훙멍즈싱에 기반한 것이다.
수년간의 적자난을 견뎌낸 싸이리쓰는 올해 원제 브랜드 산하 모델 M5, M7, M9 시리즈가 불티나게 팔리며 비로소 화웨이 후광 효과를 누리고 있다. 싸이리쓰는 올해 1분기엔 수년 만에 첫 흑자 전환이 예상되고 있다. 싸이리쓰는 올해 총판매량 목표치를 60만대로 공격적으로 잡았다.
사실 싸이리쓰와 화웨이의 협력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싸이리쓰가 적자난에 빠진 무명의 제조업체였기에 가능했다는 게 시장의 판단이다. 수년간의 적자로 사실상 문 닫을 위기에 맞닥뜨린 싸이리쓰에게 화웨이는 '생명의 동아줄'이나 다름없었기에, 협력 과정에서 화웨이가 요구하면 뭐든 다 수용한 것이다.
실제로 싸이리쓰에게 화웨이는 '스승'이나 다름없다. 현재 싸이리쓰는 화웨이 기업 문화부터 경영, 연구개발 시스템까지 모두 자사에 도입했다. 화웨이의 우리사주제를 통한 직원 인센티브 및 급여 시스템과 순환회장 경영시스템을 도입하고, 화웨이 기본법을 따라 '싸이리쓰 기본법'도 만들어 공표했다. 화웨이의 전 임원이 싸이리쓰에 직접 합류하기도 했다.
전기차 다크호스 화웨이···스마트로 승부수
원제 브랜드 성공에 힘입어 화웨이 전기차 사업부도 만년 적자를 떨쳐내고 흑자를 낼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위청둥 화웨이 스마트카 사업부 CEO는 얼마 전 전기차100인회 포럼에 참석해 "화웨이 전기차 사업부가 4월 이후 흑자 전환을 달성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화웨이 전기차 사업부는 화웨이 사업부 중 유일한 적자 사업부다. 과거 매년 100억 위안 이상의 적자를 기록해 왔으며, 지난해에도 60억 위안의 적자를 냈었다.
시장은 중국 전기차 시장에서 배터리 기술을 놓고 경쟁하던 전반전이 끝나고, 후반전부터 스마트 기술을 둘러싼 경쟁이 시작되면서 화웨이가 중국 전기차 시장의 강자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화웨이가 자체 개발한 자율주행시스템(ADS)을 예로 들어보자. 화웨이 ADS를 탑재한 차량은 운행 시간과 이동 장소만 입력하면 언제 어디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은 물론 자동 주차와 주차 경로를 최적화하는 기능도 갖췄다. 스마트조종석 시스템은 화웨이 스마트폰만큼이나 자유자재로 조작이 가능해 화웨이 자동차는 사실상 ‘달리는 스마트폰’이라는 말도 나왔다.
중국 경제매체 차이신은 “화웨이의 전기차 산업 진출로 중국 신흥 전기차 기업 3인방, 이른바 '웨이샤오리(蔚小理, 니오·샤오펑·리오토)'가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동안 '웨이샤오리'가 장기간 적자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은 전통 자동차 제조업체와 달리 인터넷 기업이라는 배경 아래 자유로운 경쟁 사고를 갖고 있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는데, 화웨이 같은 기술 기업 앞에서 이러한 장점이 무력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신흥 전기차 기업 중 독보적인 1위를 유지했던 리오토는 올 초 원제 브랜드 공세에 밀려 1위를 빼앗겼다. 리오토는 본래 올 초로 예정했던 순수전기차 모델 ‘메가(MEGA)’ 출시일도 원제 M9 모델 출시(2023년 12월 말)와 겹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3월로 미뤘을 정도다.
화웨이와 싸이리쓰의 협력이 성공하면서 중국 다른 전통 자동차 제조업체들도 잇달아 화웨이와 훙멍즈싱에 기반한 기술동맹 협력을 선택하고 있다. 치루이(체리)자동차, 베이징자동차그룹 산하의 전기차 계열사인 베이치란구, 그리고 장화이자동차다. 화웨이가 훙멍즈싱 동맹사와 함께 만든 전기차 브랜드는 원제처럼 ‘경계’를 뜻하는 ‘제(界)’자가 붙은 게 특징이다.
치루이자동차와는 '즈제(智界, 럭시드, LUXEED)'라는 브랜드를 만들고, 지난해 11월 S7이라는 신차를 발표했다.
베이치란구와는 샹제(享界, 스텔라토, STELATO)라는 브랜드를 내세워 샹제 S9라는 신차를 개발 완료했다. S9 모델은 오는 4월 말 베이징 모터쇼에서 첫선을 보여 6월 공식 출시될 예정이다.
이밖에 장화이자동차와는 아오제(傲界)라는 브랜드 이름으로 협력관계를 맺고 내년 100만 위안대 럭셔리 미니밴(MPV) 모델을 출시할 것으로 알려졌다.
화웨이는 현재로선 훙멍즈싱 동맹 산하 브랜드를 더 확장시킬 여력은 없으며, 이 4개 브랜드에만 집중한다는 계획이다.
‘콧대’ 높은 국유기업···싸이리쓰 성공 신화 이어갈까
다만 화웨이의 훙멍즈싱 기반의 동맹 협력이 모두 원제처럼 성공할 것이란 보장은 없다. 이미 치루이자동차와의 협력이 삐걱거린 경험이 있다.
치루이자동차와의 협력 브랜드 즈제 S7 모델은 지난해 11월 출시하자마자 2만 건 이상의 주문을 받으며 '성공'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출시 초기부터 생산 유통에 차질을 빚으며 차량 인도가 차일피일 미뤄졌다.
치루이자동차가 자체적으로 새로 출시한 전기차 모델 '싱지위안'이 사실상 공장 생산라인을 점유하면서 S7모델 생산은 하루 고작 몇십대 생산에 그친 탓이다. 국영기업인 치루이자동차가 화웨이 주도의 S7 모델 생산에 비협조적이었으며, 화웨이와의 갈등으로 치루이자동차 제조 부문 총괄 책임자가 사임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다행히 갈등이 봉합돼 현재 양사는 공장을 옮겨 S7의 생산 인도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치루이자동차도 즈제 브랜드를 독립 사업부로 승격시키고 미국 전기차 테슬라 모델Y에 대적할 S9 모델도 생산하기로 하는 등 협력을 한층 강화했다.
하지만 화웨이와 협력하는 자동차 제조업체는 대부분 국유기업이다. 이들은 적자난 속에 모든 걸 감내한 싸이리쓰와는 달리 콧대가 높다. 이들이 화웨이 중심적인 협력 방식에 불만을 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화웨이 전기차 솔루션의 비싼 가격도 부담이다.
실제로 천훙 상하이자동차그룹 회장도 과거 화웨이와의 협력 의향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누군가 우리 자동차에 솔루션을 탑재해 영혼이 되고, 우리는 껍데기로 전락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영혼은 우리 손에 쥐고 있어야 한다”고 답하기도 했다. 시장은 화웨이가 과연 '제2의 원제', '제3의 원제' 성공 신화를 이어갈지 예의 주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