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한화, 기아 등 국내 주요 기업들이 미국 정·관계에 지출한 로비금액은 이미 지난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미국 대선 결과에 따라 '자국중심주의'가 더욱 강해질 것으로 전망되면서 재계는 정치적 성향을 가리지 않고 미국 정계 인사를 영입하며 대미(對美) 로비에 총력을 다하고 있다.
4일 미국 정치자금 추적 단체 '오픈시크릿'에 따르면 지난해 삼성그룹(삼성반도체·삼성전자아메리카·삼성SDI아메리카)의 미국 로비자금은 630만 달러(약 84억2184만원)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업체별로는 삼성전자아메리카 489만 달러, 삼성반도체 76만 달러, 삼성SDI아메리카 57만 달러 등 순이다.
삼성그룹은 바이든 대통령 집권 시기인 2021년을 기점으로 반도체법(칩스법)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의 불확실성 해소를 위해 로비 지출을 지속적으로 늘리고 있다. 고용한 로비스트도 67명으로 전년 대비 12명이 늘며 역대 최대치를 보였다. 미국에서 로비는 합법적인 활동으로 인정되는 만큼 국내 기업뿐 아니라 각국 정부도 적극 활용하고 있다.
SK하이닉스도 지난해 433만 달러를 로비에 투입했다. 이는 전년(527만 달러)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큰 액수다.
한화그룹의 대미 로비 금액 급증세도 두드러졌다. 한화그룹은 2022년 90만 달러에서 지난해엔 80%가량 급증한 158만 달러(약 21억1277만원)을 로비금으로 지출했다. 로비스트 또한 전년(5명) 대비 2배가 넘는 11명의 로비스트를 고용했다. 미국 조지아주에 올해 말까지 3조원을 투자해 태양광 종합생산단지 솔라 허브를 구축, 북미 시장 공략에 나선 한화그룹은 IRA 보조금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기아도 지난해 110만 달러(약 14억7081만원)를 집행하면서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2019~2022년까지 매년 12만 달러(1억6044만원)를 대미 로비용으로 집행한 LG전자는 지난해는 2배인 24만 달러(약 3억2088만원)를 썼다. 최근 5년 새 가장 많은 금액이다. IRA에 따라 에너지 효율이 높은 친환경 가전을 구매하면 보조금을 주는 정책이 지난해부터 시행되면서 이에 대한 대응에 로비력이 집중된 것으로 분석된다.
인력 측면에서도 외교·안보 전문가를 잇달아 영입하는 등 '경제안보' 역량 강화에 나서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2022년 마크 리퍼트 전 주한 미국 대사를 북미대외협력팀장 부사장으로 영입해 대관 업무를 총괄하게 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북미 대외협력사업 강화를 위해 부회장직을 신설했고, 유정준 SK그룹 부회장에게 중책을 맡겼다. LG도 같은 시기 15년간 백악관에 몸담았던 조 헤이긴 전 부비서실장을 미 워싱턴 공동사무소장으로 임명한 바 있다.
현대차그룹은 외교부 출신으로 윤석열정부 초대 대통령실 의전비서관을 지낸 김일범 부사장을 지난해 5월 영입해 해외 대관 조직인 GPO를 맡기고 있다. 2023년 6월 청와대 외신대변인을 지낸 김동조 상무가 합류했고, 같은 해 12월에는 미국 국무부 대북특별대표 등을 역임한 성 김 전 주한 미국대사를 자문역으로 위촉했다. 우정엽 전 외교부 외교전략기획관도 최근 GPO 전무로 영입했다. 한화솔루션도 지난해 3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상원의원 시절 비서실장이던 대니 오브라이언 폭스코퍼레이션 수석부사장을 북미법인 대관 담당 총괄로 영입했다.
업계는 미·중 갈등이 지속되고 있는 만큼 기업들의 외교·안보 전문가 선호 현상이 강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본다. 익명을 요구한 한 재계 관계자는 "국내 기업들이 매년 미국 대관 인력과 비용을 늘리고 있다"며 "한국 정부가 미국을 상대로 쓸 수 있는 카드가 별로 없다 보니 기업들 입장에서는 각자 대책 마련에 분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