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요즘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뵙는 빈도와 거기에 머무르는 기간이 늘었다. 부친의 연세가 조만간 아흔에 가까워지고 모친 또한 잦은 부상과 인지능력 저하로 돌봄이 필요한 경우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여든이 훌쩍 넘은 나이의 두 부모님과 일주일 정도 함께 자고 먹고 생활하다 보면 늙어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한밤중에 깨어 잠들지 못하는 부친의 모습, 아마도 수십 번은 얘기했던 일을 반복해서 묻는 모친의 모습 속에서, 불면과 망각, 그리고 그 과정에서 느끼게 되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우울감이 노년기의 인간을 지배하는 일상임을 확인한다. 나 또한 언젠가는 나의 부모가 지금 거쳐 가고 있는 이 길을 걸어갈 것이고 나의 아들과 딸들,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궁극적으로 거쳐 가야 할 길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언젠가 지나가야 할 노년의 가시밭길이 언제나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필자는 가족이라는 공동체 속에 꿈틀대고 있는 강력한 힘이 이 가시밭길을 능히 넘어설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이 사실을 보아왔고 내 부모와 함께한 필자의 짧은 인생 경험 속에서도 경험칙으로서 확인한 평범한 진리이다. 그러나 요즘 시대는 가족 공동체가 가지는 이러한 영험한 힘에 대한 믿음이 깨지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하나의 단적인 예가 청첩장을 볼 기회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필자와 같이 예순의 나이에 근접해 가는 세대는 이미 결혼했어야 할 혹은 결혼 적령기에 들어선 자녀들이 많다. 그러나 자녀 결혼을 알리는 청첩장은 가뭄에 콩 나듯이 받는다. 그럴 때면 수많은 축하 인사들이 쏟아진다. 그리고 부러움과 걱정이 교차한다. 최소한 필자의 감정은 그러하다. 그런데 자녀의 결혼에 관한 문제에 대해 동료들과 대화하다 보면 놀라운 변화를 느낄 때가 많다. 그것은 부모 세대 또한 자녀의 결혼에 대해 그리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는 의견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어려운 시대에 꼭 결혼할 필요가 있는가? 독신이 오히려 더 편안하고 경제적이고 합리적이지 않은가? 집값이 비싸고 출산과 육아에 많은 노동과 돈이 들지 않는가? 여성들의 경우 직장 경력에 부담이 되며 결국에는 돈벌이를 방해하지 않는가? 이혼의 위험성도 높지 않은가? 설령 결혼을 통해 가족을 구성했더라도 가족 내 갈등과 대립으로 오히려 없느니만 못할 수 있지 않은가? 수많은 온갖 이유가 쏟아져 나온다. 여기에 자기의 노후도 어려운데 자녀의 결혼 비용을 부담하기 힘들다는 또 다른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자녀의 결혼을 서두르지도 요구하지도 않고 그저 무심히 지켜볼 뿐이다. 그리고 자신의 이러한 결정에 대해 앞서 든 여러 이유를 들면서 합리화한다. 혼인율과 출생률이 하락하는 가운데 시간은 흐르고 젊은 세대는 나이를 먹어 간다. 만혼화로 인하여 신생아의 건강도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선택의 원인이 혼인할 수 있는 여건을 제대로 갖추어주지 못한 사회나 국가에 있다고 보든, 아니면 개개인의 우매한 가치관과 판단 능력의 부재에 있다고 보든, 약 30년이라는 한 세대의 시간이 흘러간 후 우리 사회의 모습을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을 더 행복하게 할 것인지 아니면 불행의 구렁텅이일 것인지 말이다. 그리고 올바른 판단과 선택을 위해서는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보다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딸 치나미 부부는 아버지 집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둘째 아들 료타가 돌아와 병원을 이어갈 수 없는 상황에서 자기 식구들이 이 집에 들어와 살면서 이 집과 병원을 차지하고 싶어서이다. 어머니 토시코에게 딸은 속삭인다. 이 집에 들어와 살아도 좋겠냐고? 그러나 어머니는 망설인다. 아들 료타와 살고 싶어서이다. 사위보다는 며느리가 더 낫지 않을까 한다. 사위는 자동차를 파는 딜러이다. 그는 아직 자동차가 없는 료타에게 가족이 생겼으니 RV 자동차 정도는 사야 하지 않겠느냐며 제삿날에도 자동차를 팔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 이 사위는 옆방에서 잠이나 자고 밥이나 축내면서 제삿날을 보낸다. 어느 나라나 사위의 행태는 비슷한 모양이다. 한편 료타와 재혼한 며느리도 토시코의 마음에는 들지 않는다. 이미 한 번 결혼한 사람이고 거기에 아이까지 딸려 있어서다. 언제라도 아들이 이혼하였으면 하는 마음이 숨어 있다. 그래서일까? 어머니 토시코는 며느리 유카리에게 형식적으로 대한다. 손자 아츠시에게도 사랑스럽게 대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이 집을 떠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마음 한쪽에 자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며느리 유카리는 서럽고 섭섭하다. 그러면서 아들 아츠시에게 말한다. 우리에게 가족은 너와 나뿐이라고. 그때 아들 아츠시는 묻는다. 그럼 아빠는 뭐냐고. 그러자 유카리는 답한다. 아직은 아니라고. 그러나 가족으로 서서히 스며들어 올 것인데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아버지 쿄헤이와 어머니 토시코 부부는 순탄한 인생사를 살아왔는가? 동네 의사로서 한 평생을 살아온 이 부부에게도 엄청난 반전이 있었다. 자식들은커녕 남편조차도 몰랐던 반전이다. 그것은 쿄헤이가 젊은 시절 바람을 피우던 것을 알면서도 이를 참고 견디며 살아온 어머니 토시코의 삶이었다. 어머니 토시코는 태어난 아이를 업고 남편 쿄헤이가 머무는 어느 곳으로 찾아간다. 거기서 토시코는 바람을 피우는 남편을 목격한다. “블루라이트 요코하마”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 노래를 들으며 토시코는 그냥 발길을 돌린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이 이야기를 숨긴 채 평생을 살아간다. 큰아들 준페이의 제삿날 저녁 토시코는 이 블루라이트 요코하마가 담긴 음반을 틀어 가족이 함께 이 노래를 듣는다. “거리의 불빛이 참으로 아름다워 요코하마 블루라이트 요코하마/ 당신과 둘이서 행복하다오/ 언제나처럼 사랑의 고백을 내게 주세요, 당신으로부터/ 걸어도 걸어도 작은 배처럼 나는 흔들려/ 흔들려 당신의 품속으로/ 발소리만 따라오네, 블루라이트 요코하마/ 부드러운 입맞춤 다시 한번 더...” 남편은 토시코의 행동이 수상하기만 하다. 왜 자기가 바람을 피울 때 듣던 그 음악을 토시코가 듣고 있는가? 그리고 그 진실을 알게 된 후 쿄헤이는 화들짝 놀란다. 그리고 미안함과 창피함이 몰려온다. 쿄헤이의 아내 토시코는 걸어도 걸어도 작은 배처럼 흔들리면서도 이 부부 사이를 지켜 왔고 이 가족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큰아들이 목숨을 바쳐 살린 어린아이는 어느덧 커서 성인이 되었다. 그는 매년 큰아들 준페이의 제삿날에 이 부부를 찾아와 감사를 표한다. 그런데 목숨을 바쳐 살려낸 이 아이의 모양새가 쿄헤이 부부에게는 여간 실망이 아니다. 100킬로그램이 넘는 비만에다가 변변한 직업도 없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못난이이기 때문이다. 내 아들 준페이가 이런 못난 놈을 살리려고 죽었다니 정말 분하다고 분개한다. 그리고 이놈은 앞으로도 매년 찾아와서 내 앞에 무릎을 꿇고 감사해야 하고 사과해야 하고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여긴다. 이렇게 분노의 화살받이가 되어야만 큰아들을 잃은 슬픔과 고통을 다스릴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허망하게 아들을 잃고 하소연할 데 없는 부모 심정을 누가 이해할 수 있으랴! 이 아이에게 이들 부부는 날카로운 화살을 쏘아댄다. 구조받은 이 아이는 또 무슨 죄가 있는가? 료타는 자기 부모의 이런 모난 마음을 탓한다.
이렇게 이 가족은 온갖 이기적 속셈과 갈등으로 찌들어 있다. 료타 가족은 다음 날 집으로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이렇게 대화를 나눈다. 역시 하룻밤 머물지 않을 것을 괜히 묵었다고! 그러면서 다음번 설날 집에 올 때는 인사만 드리고 바로 돌아가자고! 료타는 아버지와 함께 가자고 약속했던 축구 경기를 끝내 한 번도 함께 가지 못했다. 그리고 몇 년 후 아버지 쿄헤이는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바람피웠다고 속으로 평생 남편을 원망하던 어머니 토시코도 얼마 지나지 않아 서둘러 남편을 따라간다. 그렇게도 남편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남겨진 아들 부부는 형 준페이의 기일과 명절에 가족 묘지를 찾아간다. 비석에 시원한 물을 뿌려주면서 돌아가신 가족들의 명복을 빌어준다. 그들은 걸어왔던 전과 달리 이제 어엿한 RV 자동차를 타고 왔다. 또 아이도 하나 더 낳아 데려왔다. 진짜 가족이 된 것이다. 자동차 딜러를 하는 매형으로부터 자동차를 산 모양이다. 이기적이며 갈등을 안고 살면서도 이 가족은 서로에게 의지하고 위로하며 그렇게 살아간다.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2000년대 일본의 가족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가족의 모습과 참으로 흡사하다. 수많은 갈등과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도 결국은 인간 행복의 원천이 가족 공동체에 있음을 이 영화는 강조하는 것이 아닐까? 필자가 시골의 노부모님을 찾아 소소한 식사와 평온한 저녁을 함께 보낼 때의 행복감은 어렵지만 함께 일궈 온 가족들의 노고와 배려가 있어서일 것이다. 인생사에서 맛보는 이러한 행복감을 대체할 다른 많은 것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 필자에게는 이보다 더 나은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필자의 상상력이 부족한 탓일 수 있다. 또 필자의 경험이 부족한 탓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가족을 구성하고 이를 잘 일궈가는 노력은 언젠가는 이보다 더 큰 행복감으로 우리를 보상할 것이라고 믿는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 가족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의 행복을 일구는 데 가족이 어떤 역할을 해 주는지 한번 더 고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정성춘 선임연구위원
▷서울대 경제학과 ▷히토쓰바시대학(一橋大學) 경제학연구과 경제학 박사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