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혼자 또는 조직생활을 하면서 마음이 힘든 이유는 나와 주변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와 사회는 어떤 관계인가’ 등의 질문에 끊임없이 답을 찾는 과정이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릴 적 나와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던 큰형이 시골에 내려오면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었다. “이두수, 너는 커서 뭐가 될거야?” 사실 이 질문이 나에겐 무척 거북했다. 뭐라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내가 커서 뭐가 될지 아무리 생각해도 될 만한 것이 없었고, 내가 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조차도 몰랐다. 그만큼 나에 대한 자신감이나 자존감이 약했다. 그런 나에게 이런 질문은 강요였고 협박이었다. 나는 지금도 이 질문을 나에게 던지며 답을 구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답은 아니지만 힌트를 준 분이 계시다. 바로 아버지다. 아버지는 내게 뭐가 되라고 강요하지 않으셨다. 다만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야. 그렇게 살면 되는 거야”라고 하셨다.
다르다와 틀리다
우리 일상생활 중에 자주 접하는 잘못된 언어습관이 하나 있다. ‘다르다’와 ‘틀리다’이다. ‘다르다’는 ‘같다’의 반대말이고, ‘틀리다’는 ‘맞다’의 반대말이다. 영어로는 ‘different’와 ‘wrong’으로 표기한다. ‘다름’과 ‘틀림’은 그 의미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의 언어생활에서 이 구분을 명확하게 하지 않으며 보통은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너와 나는 달라’와 ‘나하고 너는 틀려’ 이 둘의 표현은 전혀 다른 의미의 문장이다. 하지만 우린 때로 이 문장을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예시처럼 ‘비교가 되는 둘 이상의 대상이 같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자 할 때는 ‘다르다’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 반면 ‘사실이 그릇되거나 어긋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할 때는 ‘틀리다’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 ‘다름’을 써야 할 자리에 ‘틀림’을 썼을 때 말의 의미는 엉뚱해지고 만다. 여기서 그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이 ‘틀림’은 ‘나쁨’으로 전이되고 ‘나쁨’은 ‘악’으로 점점 그 의미가 전승·확산되는 것이다.
다름은 서로의 입장이 같지 않고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사용하는 반면 틀림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 기준에 맞지 않고 그릇되고 어긋난 것을 ‘틀리다’고 할 수 있다. 의식이나 비전, 이념에 대한 전체주의적 성향이 강한 사회에서 이 다름과 그름은 강한 쏠림 현상으로 틀림으로 전화되고 쉽게 악으로 규정되어 사회에서 매장당하는 어처구니없는 경향이 벌어진다.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에 따르면 단 하나의 진리가 있다는 믿음과 그 진리가 인간 세계에 어떠한 형태로든 관여한다는 믿음이 강하고 이 진리를 인간이 터득할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한 사회일수록 인간을 ‘정교한 통제’ ‘전체적 억압’ ‘현자의 독재’에 기초한 변화를 발전된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고 한다. 인터넷으로 연결된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콩 떠는 이야기
며칠 전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둘째 형이 콩을 떨다가 팔이 기계 속으로 말려들어가 큰 수술을 받았다. 면회를 갔는데 누워 있을 줄 알았는데 팔 이외는 멀쩡하다며 괜한 걸음을 했다고 핀잔을 주었다. 시골농가에서 다른 사람들보다는 농사를 제법 많이 짓는 형으로서는 오른손을 다친 것이 그에게 정신적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한 것 같다.
형의 이야기다. 예전에 농사는 한 마을이 함께 짓는 공동 행사였다. 특히 추수는 여러 사람 일손이 필요했고 하나의 축제였다. 산업화와 더불어 사람들 일손은 기계가 대신하게 되었다. 이번 사고는 혼자 콩을 떨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경운기를 쓸 때만 해도 추수하는 사람이 여럿 필요했고 기계 힘도 약해 사람이 기계에 끼인다고 해도 기계를 멈출 수 있었고, 누군가 구조할 사람이 있었다. 이제는 트랙터 엔진 힘을 이용하여 농기계를 사용하니 힘은 커졌고 사람이 기계에 끼여도 기계는 멈출 줄 모른다. 혼자 일하다 보니 주변에 도와줄 사람도 없다.
이번 사고를 통해 정말 사람이 무엇인지,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조상 대대로 지어 온 농사지만 그 기법은 완전히 달라졌다. 농사에 대한 태도도 달라졌다. 생명, 먹거리라기보다는 하나의 상품을 생산하는 생산자의 입장이고, 모두가 함께 짓는 농사가 아니고 나 혼자 밥벌이하는 하나의 사업이 되었다. 이렇게 해도 될까. 이렇게 살아도 될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사회 운영과 변화에는 정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정치가도 이 사회의 공동체 문화를 생각하기보다는 정치를 일종의 자기 사업으로 여길 것이라 생각하니 갑갑하고 답답하고···. 결국 내 문제로 돌아와, 그럼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로 환원되고 마네.
나와 우리라는 공동체
카프카의 ‘변신’이라는 소설이 있다. 어느 날 일어나 보니 내가 벌레가 되어버린 것이다. 비슷한 내용으로 사람이 파리, 개미, 박쥐가 되는 내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주인공인 그레고르 잠자(Gregor Samsa)는 잠자고 일어났더니 자신이 큰 벌레로 변해 있었다. 가족은 혐오스러운 거대 벌레를 집 밖으로 내보낼 수도, 일을 시킬 수도 없기 때문에 그를 멀리하게 되었고, 그레고르는 자기 방 안에 갇혀서 먹이를 받아 먹으며 비참하고 희망 없는 삶을 살게 된다. 그레고르가 벌레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일할 사람이 없게 되어 가정의 살림은 극도로 궁핍해지고 주위 사람들 시선도 갈수록 차가워져갔다. 결국 그레고르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은 상처가 악화되어 쓸쓸히 어둠 속에서 죽음을 맞는다. 시체는 가족도 아니고 가사도우미 할머니가 쓰레기처럼 내다버렸다. 그리고 그레고르로 인한 고통에서 겨우 해방된 가족들은 밝은 미래를 그리며 이사를 간다.
올해 4월경부터 우리 사회에는 이 카프카의 ‘변신’ 소설을 패러디한 벌레 게임이 유행이었다. 느닷없이 부모님에게 '어느 날 자신이 바퀴벌레로 변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물음을 던져 반응을 살피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불안이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선 특별한 용어다. 우리나라, 우리 동네, 우리 학교, 우리 회사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집, 우리 엄마, 우리 딸, 우리 집사람이라고 부를 때 ‘우리’는 어떤 의미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우리라는 말 자체가 울타리의 의미를 가진 공간의 의미가 있어 같은 공간에 사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공간으로서 ‘우리’는 명사로 동물을 가두어 기르는 공간으로 사용한다.
‘내가 벌레로 변하면 어떻게 할거야?’라는 질문에는 우리로서 내가 아닌 우리 바깥의 나였을 때 우리의 인식은 어떻게 변할까에 대한 불안인 것이다. 우리 학교, 우리나라, 우리 회사, 우리 집에서 나는 어떤 위치에 있느냐다. 나는 거기에 존재하기는 하는가. 모두가 동일한 존재로 있을 때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해야 할 때는 독창적인 태도나 독창적인 생각이 통용되지 않는다, 독창적이 된다는 것은 이질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즉 벌레가 되는 것이다. 남들과 같은 생각, 남들과 같은 행동을 취하지 않아 벌레 같은 존재로 취급되었을 때, 즉 집단 왕따를 당했을 때 부모님은 나를 어떻게 대해줄 것인지에 대한 불안과 확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에서 벗어나 ‘나’로 살려고 할 때 부모는 나를 인정하고 응원해줄 것인지에 대한 확인이다.
나, 유일무이한 존재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다. 자기 자신의 고유한 의미와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가 있다. 그래서 개성진리체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은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한다. 부처는 자신을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설파했다. 성서에서는 하나님의 지정의를 닮아 난 말씀의 실체란 뜻으로 인간을 개성진리체라고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고유하고 개성 있는 존재이며 그러한 특성을 살려 나가야 할 숙명적 존재라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모양이 다르고 피부색이 다른 것을 기뻐하고 찬양하며 생각이 다른 것을 존중해야 마땅하다.
화엄경을 축약해 설명한 의상대사의 법성게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一微塵中含十方(일미진중함시방), ‘하나 가운데 일체가 있고 일체 가운데 하나가 있으며,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며, 하나의 미세 먼지 가운데 시방세계가 들어 있고, 일체 먼지 중에도 그러하다’라는 게송 중 한 구절이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나와 너는 이 우주에서 서로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연결되어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행복하면 남도 행복해지고, 남이 불행하면 나도 불행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아서 서로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관계적 존재로서 인간
人間이든 人이든 한자로 써보면 사람은 확실히 관계적 존재임을 알 수 있다. 間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적 존재를 말하고, 人은 사람이 서로 기댄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자립된 인간끼리 필요에 의해 서로 기댄 모습이라면 서로 동등하게 기울인 모습이거나 꼿꼿하게 선 상태에서 서로 손을 잡은 모습일 수도 있을 텐데 人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몸을 기울여서 돌보는 모습을 하고 있다. 서로 기대고 있지만 비대칭적으로 몸을 기울여서 취약성을 돌보는 것이 인간임을 표현하고 있다.
서로의 취약성으로 몸을 기울여서 돌보는 관계, 이 관계는 누구에게나 필수적이다. 수직적인 권위가 남성적 권력과 질서를 표현한다면 기울어진 선은 그와는 다른 질서와 세계 구성의 원리를 담지한다고 페미니스트들이 말하기는 하지만 타자를 향해 비스듬히 기울어진 상태에서만이 타자에게 갈 수 있고 응답할 수 있다.
한 개인을 지칭하는 個는 人변에 딱딱하다는 固를 쓴다. 고체에선 구성 성분이 교류할 수 없듯이 교류하지 못하는 인간은 물이 얼어 차가워진 얼음처럼 딱딱해진 것이 個다. 그래서 사람이 아닌 물건을 셀 때 개를 쓴다. 상대를 향한 말랑말랑한 마음이 없거나 뭉클하고 질척거리는 영혼이 없는 딱딱한 몸은 물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관계적 존재라고 하는 것은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관계가 좋다고 하는 것은 타인을 존엄한 존재로 기꺼이 수용하는 것이다. 이타성은 바로 여기에서 나오며 자유라고 하는 것은 이 상호관계 속에서 자유롭게 통교하는 것을 말한다. 실제 존재의 힘은 여기서 나오며 번식과 창조의 힘도 여기서 나온다. 각기 다른 너와 내가 평화롭게 관계한다면 우리 사회의 내부 통합도, 진영 논리도 아무 장애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영어에서도 상대를 기억하고 존중하는 말에는 모두 re-(다시)가 들어가 있다. 기억하다 re-member, 인정하다 re-cognize, 존중하다 re-spect 등 모두 상대를 내가 다시 기억하고 다시 한번 더 생각해 주는 것이다. 당신이 우리 공동체의 일원임을 우리가 기억하고, 달라진 변화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임을 인정하며, 당신이라는 고유함을 계속해서 ‘다시-보기’하겠다는 것이 존중이다.
전통적인 인권론이나 서구철학에서 인간 존엄의 개념은 인간의 이성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정언명령을 세운 칸트는 인간의 이성을 근거로 존엄을 설명했다. 인간은 이성이 있기에 생각할 줄 알고 선악의 법칙을 세우는 능력을 가진다. 자기 삶의 목적을 설정할 줄 알고 그에 따른 자기 행위에 책임을 진다. 이 책임 능력은 인간 이성의 자율성에 기초한다. 인간은 너에 대해서 나를 세우고 선악을 분별하여 이것을 서로 견주어서 의견을 세우고 타인과 의사 소통할 수 있다. 이렇게 ‘나’로서 나타나는 것이 인격이다.
그러나 만년에 기억장애를 동반한 치매를 앓았던 칸트는 자신의 이성의 힘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성숙한 인간이라고 강조한 그였지만 말년의 그를 존엄하게 지켜준 것은 그 자신의 ‘이성’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인정’이었다.
12월 말 한 해를 돌아보며 어떻게 활동해왔는지에 대한 성찰보다는 삶이 무엇인지, 사는 것은 결국 나와 공동체의 관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서 세상을 변혁하고 변혁할 수 있는 힘이 나온다고 믿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 것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태도가 삶의 시선과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필자 소개 -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왔다. 현재는 글로벌피스재단에서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평화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