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은 가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닌 이 시기에 비가 내리면 기분도 음습하다. 왠지 죽은 자가 찾아오기라도 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11월에 비는 눈이 되지 못한 채 내리는 차가운 비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다. 11월은 그런 계절이다. 1과 1일이 병립되어 있어 마치 우리 사회가 서로 일인자가 된 듯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다. 그래서 11월은 불편하다.
스페인으로 떠나기 전 지난 토요일 인천의 작업현장은 무척 추웠다. 아침에 살얼음이 얼어 있었는데 한 낮이 되어도 풀리지 않아 미장을 하면서도 이것이 제대로 굳은 것인지, 아니면 얼어서 붙은 것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방동제를 쓰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라서 이 맘 때 날이 추워지면 작업하기가 곤란해진다.
11월에 나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개인 그림 전시회를 계획해 왔다. 솔직이 나는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한다. 내 그림에 대한 자신감이 없다. 단지 내가 직접 겪고 있는 노동현장이나 삶의 현장에서 곁에 있는 동료들을 그렸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그런 작업현장을 그렸기에 사람들은 흥미로워 한다. 그래도 요즘은 그림을 잘 그리고 못 그리고를 떠나 그림에 얽힌 이야기에 더 관심을 갖는 거 같아 나에겐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현재 일하는 회사에 스페인 전시회를 위해 2주간의 휴가를 신청했다. 좀 과한 기간이다. 그것도 바쁜 연말에 행사도 많아, 누구는 준비하고 실행해야 하는데 나만 빠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는 것임에는 틀림없어 마음이 불편했다.
창고에서 발견된 노동자의 스케치북
일용직 건설노동자의 그림이 해외 전시회라니, 그것도 단독으로… 개인적으로 영광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건설노동자를 대표하는 그런 의미 있는 행사가 될 것이라 마음먹었다. 요즘 한류 콘텐츠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고 인기도 끌고 있는데 이런 기회에 나도 편승해보자는 기분도 들었다. 한 건설노동자가 노동에 대한 고민과 나름의 시각을 가지고 그림으로 표현한 것을 글로벌하게 공유해 보는 것은 한 개인의 전시회를 넘어 건설노동자를 대표하는 내용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전시회가 열리는 스페인은 15세기 해양시대를 연 역사적 의미를 지닌 매우 중요한 나라다. 전시장은 마드리드 시내 론다 거리에 있었다. 론다는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나’를 집필한 곳이며 그가 말년을 보낸 곳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이 세상에 너 하나뿐이라서 널 사랑한 게 아니라, 널 사랑하다 보니 이 세상에 너 하나뿐이야’ 누에보 다리 위에서 던진 이 한마디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그 명대사가 추억처럼 남아 있는 곳이다.
스페인에는 우리나라에도 친숙한 예수회(제수이트)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프랑스나 독일 지역에서 칼빈이나 루터 등의 종교개혁의 바람이 일어났을 때 가톨릭을 보호하고 자체의 개혁을 부르짖으며 나타난 것이 이냐시오 테 로욜라를 중심한 제수이트다. 이들은 가톨릭의 전통과 교의에 따라 더욱 철저한 신앙을 하면서도 자기 반성과 절대복종을 근간으로 가톨릭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며 무엇보다 해외선교에 앞장섰다. 당시 조선에까지 가톨릭이 전래된 데에는 이들이 중국이나 일본선교에 앞장서면서 성경을 한문으로 번역해 놓은 ‘천주실의’ 라는 책을 조선의 사신들이 들여온 것에서 비롯되었다.
스페인은 이외에도 강점이 많은 나라다. 스페인어는 세계 21개국의 모국어가 되며 세계인구의 사용인구 중 중국어에 이어 2위를 차지한다. 근미래 기대수명 1위, 세계관광경쟁력 평가 1위, 태양열발전 세계 1위, 세계문화유산 보유국 3위, 와인생산 세계 3위, 그리고 역사상 최고의 문학으로 칭송받는 돈키호테의 나라이며, 살바도르 달리, 피카소, 고야 등 무수한 화가들 등 풍부한 역사적인 유산뿐만 아니라 미래를 볼 때도 많은 가능성이 있는 나라다.
이번 전시회 제목은 ‘창고에서 발견된 노동자의 스케치북’이다. 소제목으로 “꽃을 배달하는 사람들”로 정했다.
노동자의 스케치북은 노동자의 눈으로 노동자의 손으로 노동현장을 그렸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붙였다. 실제 이 그림은 노동현장에서 그려진 그림이기도 했고, 세련되게 잘 그린 그림은 아니며 오히려 투박하고 거칠다. 그래서 현장성이 더 느껴진다. 이른 새벽에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거리청소부, 사무실에서 만나는 건물 청소부, 길거리에서 건널목 안전을 지키는 자원봉사자, 그리고 건설현장에서 만나는 각 공정의 노동자들 모습이다. 그림은 노동과 일에 대한 성찰이 중심내용이다.
노동의 의미 그리고 진짜 노동과 가짜노동
고대 그리스에서 노동은 칭송되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당시 그리스 사회는 시민과 노예로 나뉘어 있었고, 시민들이 가진 특권 중의 하나가 여가였다. 그들은 여가 시간에 아고라에 모여 토론이나 강연 모임을 주로 했고, 시민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고 믿었다. 그러나 몸으로 하는 노동에 대한 생각은 좀 달랐다. 구두장이는 고객을 위해 구두를 만들지만 신발제작은 신발의 본질에 복종해야 하는 부수적 활동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여가시간을 스콜레(schole)라고 불렀고 이런 토론회나 강연회는 학교school의 기원이 되었다. 이런 배움은 더욱 더 완전한 인간, 진리에 근거한 삶을 만든다고 생각했다. 이와는 반대로 육체 노동은 하찮음의 대명사였고 부자연스런 인간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평생 일하는 사람은 그의 말조차도 가치가 낮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노예나 일꾼들이 가치 있게 여겨지지 않은 것은 그들이 잘못이라기 보다는 그들이 덜 고상하며 진리나 인격이 잘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노동의 본질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보기 시작했다. 마태복음 25장의 우화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한 주인이 여행을 떠나며 세 노예에게 달란트라는 금화를 맡겼다. 첫번째 노예에게는 금화 5개를, 두번째 노예에게는 금화 2개를, 세번째 노예에게는 금화 1개를 맡겼다. 첫번째와 두번째 노예는 장사를 해서 금화를 각각 10개와 4개로 불렸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이들은 자신이 불린 금화를 내보이니 주인은 그들을 칭찬하며 더 큰 책임을 맡길 거라고 말했다. 그런데 세번째 노예는 받은 금화를 땅에 묻었다. 주인이 돌아오자 그 노예는 묻었던 금화 1개를 내 보이자 주인은 화를 내며 그 금화를 첫번째 노예에게 주라고 명령했다. 이 우화는 다양한 해석을 해 볼 수 있다. 우선은 우리는 우리의 재능을 묻어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재능이나 재화를 발전시키며 제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이것은 그리스적 사고 방식에서 기독교적 방식으로 전환이다. 즉, 고대 그리스에서는 원래 가진 재능의 양이 중요했지만 기독교인에게는 그 재능으로 무엇을 했느냐가 더 중요해진 것이다. 즉 과정에서 중요한 가치가 생긴 것이다. 그리스인들에게는 더 많은 것을 가진 것이 중요했지만 기독교인들에게는 가진 것이 중요하기 보다는 양을 불리는 과정이 더 중요했다. 이것이 서구 문화에서 노동의 가치를 가지게 된 근원이다.
이런 생각은 독일의 헤겔이나 마르크스로도 연결되었다. 이들은 노동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했다. 일한다는 것이 인간이 되는 것이다. 노동하지 않는 것은 인간성을 실현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물론 이 노동은 임금제나 시간 일당제 노동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에는 자신이 탈 보트를 만들거나 자신이 먹을 음식을 만드는 일도 포함된다. 즉 노동은 처리활동이다.
어떤 사물을 만들고 처리하는 과정은 인간이 자신의 환경과 유기적으로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이며 한 인간이 세상으로 들어가서 자기 자신의 방식을 만드는 것이다. 인간이 환경을 주관하고 자신을 외면화하는 것을 노동이라고 마르크스와 헤겔은 말했다.
즉 노동은 인간의 내면을 외면화시키고, 또한 외부를 내면화 시키는 과정이며 활동이다. 그렇게 인간은 자신 안에서, 환경 안에서 자리를 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일할 때, 즉 세계와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할 때 자유롭다. 이렇게 노동은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와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어서 노동은 ‘본질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세계와 유기적 상호작용하는 방식의 유일한 핵심은 본질적으로 살고 있는가 비본질적으로 살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이 문제는 노동이 인간을 세계에서 소외감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다는 뜻도 된다. 즉 인간의 성립과 봉괴는 모두 노동에 달려 있다.
이렇게 노동이 인간 존재에 있어 필수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의미 있는 과정에 참여할 때 안정감을 느낄 것이며, 비본질적인 노동에 참여할 때는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소외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소외상태란 무엇이 진짜 노동이고 무엇이 가짜노동인지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사무직 노동일수록 즉, 시간엄수, 해결책의 모색과 모방, 과시, 감사, 회의, 홍보, 규제 같은 것들이 오히려 노동자를 노동에서 소외시키며 결국에는 노동자가 자신이 하는 일에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게 만든다. 현대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과거보다 더 많은 일을 하면서도 일로부터 더 많은 소외감을 느낀다. 그래서 정신적 불안감이나 우울증이 더 많아지고 있다. 이것은 가짜 노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빈둥거리기, 시간 늘리기, 일 늘리기, 그리고 일 꾸며내기 등이 대표적이다. 그저 모니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려 대고 전자 달력을 칸칸이 채워보며 관리자의 눈을 속인다. 관리자의 눈을 속이기 보다는 자신이 필요 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업무와는 상관 없는 뉴스나 보고, SNS나 블로그에 게시물을 올리고 채팅을 한다. 바쁜 척하면서 아무 결과나 결실을 내제 못하는 계획과 실행의 반복이다. 이런 일의 반복은 오히려 노동자로 하여금 자존감을 잃게 하며 급기야는 정신 분열증을 가져오는 것이다.
진짜가 된다고 하는 것
<창고에서 발견된 노동자의 스케치북>Cuadernos de arista dentro de una caja de herramientas이라는 제목의 내 전시회 오프닝 세레모니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소감을 전했다.
나는 최선(最善)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한자로 보면 ‘최고로 좋다’ 라고 하는 것은 있는 힘을 다하는 '최선을 다하는 행위'를 말한다. Best of best is a behavior to do your best.
이번 전시회 소제목은 ‘꽃을 배달하는 사람’이다. 여기 모인 여러분은 모두 '꽃을 배달하는 사람'이다. 꽃이란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해 사는 사람을 말한다. 삶에 최선을 다하는 그 행위가 노동이다. 노동이란, 자기 내면의 가치나 규율 혹은 비전를 외면화하는 과정을 말한다. 그것이 루틴한 것이라도 늘 긍정적인 태도로 최선을 다해 일하는 사람, 그 사람이 진짜 노동자다.
이번 전시회 그림은 건설노동자나 청소노동자를 주로 그렸는데,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분들이다. 크게 대우받는 입장은 아니지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분들이다. 더러움, 오물, 먼지, 쓰레기 그리고 위험. 이런 것은 우리가 싫어하는 것들이지만 이런 것을 처리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 노동자들이다.
겉으로 보면 어렵고 힘들고 더러워 보이지만 막상 이런 일도 해보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 우리가 평소에 이상으로 삼는 행복, 평화, 청결, 협동 이런 가치와 비전을 우리는 어떻게 이루려고 하는가. 말로 하는 연설, 멋진 글로 쓰는 칼럼 혹은 멋진 프로젝트 페이퍼 작성 등등 나름 의미있는 일들을 하고 있지만 그런 일들이 정말 행복한 보람으로 찾아오지는 않는다. 그것은 가짜노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짜 노동을 해야 한다. 내 내면의 가치와 이상을 실현하는 실천이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Do your best! Do it 하는 것이다. 우린 행위를 노동이라고 한다.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하지만 몸으로 하는 행위에 좀 더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 그동안 우리는 몸으로 하는 행위를 비하하거나 천시해 왔다. 그리스 역사를 보더라도 몸으로 하는 노동은 주로 노예들이 담당했고 그래서 육체노동을 천시했다. 기독교, 특히 프로테스탄트의 등장으로 노동에 대한 관이 바뀌면서 비약적인 생산력의 발전을 가져왔다.
오늘 이 시간, 이 공간이 삶에 최선을 다하는 인생, 자기 삶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 열심을 다하는 노동자, 꽃을 배달하는 그런 마음, 그런 생각을 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