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아주경제신문은 지난 9월 19일 시작한 ‘지역혼의 재발견-나주정신’시리즈를 26일자로 마무리한다. 마지막 편은 고려를 창건한 왕건의 부인 ‘장화왕후’이다. 그동안 ‘나주 정신’을 대표하는 인물 15명을 매주 1명씩 소개했다. 호남 최초 의병장 김천일(1537~1593)을 필두로 조선 최고의 로맨티스트이자 시인인 풍류남 백호 임제(1549~1587), 조선 중기 명재상 박 순(1523~1589), 이순신을 도와 거북선을 제작한 나대용(1556~1612) 장군, 대신그룹 창업주 양재봉(1925~2010), 조선시대 견문록 ‘표해록’을 쓴 최부(1454~1504), 최초 인권변호사 이돈명(1922~2011), 한말 의병장 김태원·김율 형제, 한글 창제의 주역 신숙주(1417~1475), 해군의 원조(元祖)이자 관음포대첩 주인공 정지 장군(1347~1391), 광주여성운동의 ‘대모(代母)’ 조아라(1912~2003), 3대(代)에 걸친 독립운동가 김창곤·김철·김재호, 고종의 총애를 받은 판소리 명창 김창환(1854~1939), 고려 충렬왕 때 大문장가이자 정치가 설재(雪齋) 정가신(1244~1298년)의 삶과 정신을 조망했다. 그동안 성원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본지는 이에 앞서 21세기 한국의 정신가치를 새롭게 조명하는 기획시리즈를 연재했다. ‘다석 류영모’를 비롯해 ‘지역혼의 재발견-광주 정신’을 천착했다. 본지는 경제가치보다 정신가치를 더 소중히 여긴다.
전남 나주시청 300m앞에 작은 샘이 있다. 완사천(浣沙泉)이다. 이 샘은 유서가 깊다. 오래 전부터 아무리 가물어도 샘물이 마르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4대 미인(美人) 중 한 명인 서시(西施)는 ‘완사(浣沙) 서시’라 불렸다. 서시는 중국 강남의 샘가에서 비단을 씻던 소녀로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경국지색이었다. 서시의 아름다움을 보고 ‘물고기가 부끄러워 물속으로 들어갈 정도’였다고 한다.
장화왕후의 사연이 담긴 ‘완사천 이야기’와 맥이 닿는다.
“장화왕후는 태어나고 사망한 때가 언제인지도 모르는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총명하고 빼어난 용모를 지녔다. ‘용’으로 상징되는 왕건과 완사천에서 만나 혼인하고 고려 2대 혜종(惠宗)이 되는 왕무(王武, 912~945)를 낳았다.”
아들 혜종은 ‘주름살 임금님’
‘고려사 열전’에도 이 세기적 로맨스가 자세히 그려졌다.
“장화왕후 오씨는 나주 사람이다. 조부는 부돈이고 부친은 다련군인데 집안 대대로 목포에서 살았다. 다련군은 사간 연위의 딸 덕교에게 장가들어 후(왕후 오씨)를 낳았다. 후가 일찍이 나루터의 용이 뱃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고는 놀라서 깨어나 부모에게 말하니 모두가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얼마 후에 태조가 수군 장군으로서 나주에 출진했는데 배를 목포에 정박하고 냇가를 바라보았더니 오색운기(五色雲氣)가 있었다. 태조가 그곳에 이르자 곧 후가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태조가 불러 이를 총애하였다. 오씨의 출신이 미천해 잉태시키지 않으려고 침석(寢席, 돗자리)에 뿌렸는데 후가 이를 흡수하여 마침내 잉태하고 아들을 낳았으니 곧 혜종이었다. 혜종의 얼굴에 돗자리 무늬가 있었으니 세간에서 그를 ‘주름살 임금님’이라고 불렀다.”
이 역사서를 쓴 이들은 장화왕후가 미천한 신분이고 혜종을 ‘주름살 임금님’이라고 낮잡아 봤다. 이는 나주 호족들이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지만 나중에 다른 호족들과 권력 싸움에서 세력을 잃었음을 시사한다. 역사는 늘 승자의 관점에서 서술되지 않던가.
‘고려사 열전’은 이어진다.
“왕건이 물 한 그릇을 청하자 처녀는 바가지에 물을 떠서 그 위에 버들잎을 띄워 공손히 바친다. 왕건이 그 이유를 묻자 처녀는 “급히 물을 마시면 체할 수 있으니 천천히 드시라고...” 말끝을 흐린다. 왕건은 처녀의 총명함에 이끌려 아내로 맞았다. 장화왕후다. 곧 혜종을 낳았다. 왕건은 혜종이 태어난 나주 일대를 흥룡동이라 부르고 흥룡사라는 절을 지었다. 나주 사람들은 흥룡사에 혜종을 모신 혜종사를 짓고 고려 시대 내내 제사를 올렸다.”
견훤과 싸움에서 이기고 후삼국 통일
고려 건국의 이야기는 후삼국 통일의 이야기다. 후삼국의 영웅들은 왕건(王建, 877~943), 견훤(甄萱, 867~936), 궁예(弓裔, 869~918)다. 그중에서도 견훤과 왕건은 평생의 라이벌이었다. 결국 왕건은 견훤의 후백제를 물리치고 고려를 건국하게 된다.
견훤은 892년에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광주)를 점령하고 왕위에 올랐다. 900년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의 왕이라 칭했다.
왕건은 송악의 해상 세력으로 896년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의 장수였다. 903~914년까지 10년 동안 견훤과 왕건은 패권을 다투었다. 싸움터는 전라도 나주였다.
그때도 나주는 곡창 지대였다. 또 영산강과 서남해안을 잇는 해상운송의 요충지다. 나라의 큰 곳간이었고 군사적으로는 전략지였다.
견훤이 처음엔 나주를 차지했지만 909년 덕진포에서 왕건이 견훤의 함대를 격파하고 지금의 신안 압해현의 해적 능창을 사로잡아 해상권을 장악했다. 929년 견훤이 다시 나주를 탈환한다. 그러나 935년 그의 장남 신검의 쿠데타로 실각해 금산사에 감금당한다. 이듬해 왕건이 견훤과 함께 대군을 거느리고 일리천에서 결전을 벌여 신검의 항복을 받아 내면서 마침내 후삼국 통일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된다.
고려시대 내내 특별대우 받은 나주
나주는 903년 이래 고려 건국 시기인 936년에 이르기까지 왕건의 땅이었고 이것이 고려 창업에 가장 큰 힘이 됐다. 완사천의 설화는 나주 호족들이 왕건과 함께 고려를 탄생시킨 역사의 상징이었다. 또 나주가 ‘천년 목사골’로 ‘전라도’의 천년을 이은 역사 도시로 자리 잡는 출발점이 됐다.
완사천은 역사유적으로 남아 있다. 여기엔 왕건과 나주 오씨 장화왕후가 처음 만나는 장면이 동상으로 재현돼 있다. 장화왕후 유적비, 완사천 우물이 있다.
나주는 영산강 유역의 최대 곡창 지대이자 해상무역의 중심지였다. 후삼국 시대의 통일 위업을 달성할 수 있는 거점이었다. 나주 호족들은 견훤이 아닌 왕건을 도왔다. 나주사람들 도움으로 왕건은 삼한을 통일할 수 있었다.
임금을 배출한 어향(御鄕)이 되면서 나주의 위상이 확고해진다. 나주는 백제 시대에 발라주(發羅州)였다가, 통일 신라 이후 9주의 하나인 무진주(武珍州)에 속했다. 후삼국 시대 태봉에 편입된 이후에는 지명이 바뀌어 나주로 불렸는데 이후 58개 군현을 아울렀다. 나주는 고려 시대 내내 특별대우를 받았다.
고려 혜종의 이야기가 ‘고려사’에 다시 등장한다.
“나이 7살이 되자 태조가 혜종에게 왕통을 이을 만한 덕이 있음을 알았으나 모친이 미천하여 뒤를 잇지 못할까 두려워했으므로 상자에 자황포를 넣어 후에게 주었다. 후가 이를 대광 박술희(朴述熙)에게 보이자 술희가 그 뜻을 헤아려 알았으니 혜종을 세워 태자에 책봉했다.”
혜종은 왕이 되었지만 유력 호족들의 대립과 왕위 쟁탈 때문에 재위 3년 만인 945년에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이후 성종은 983년 전국에 12목을 설치하면서 나주에 나주목을 두었다. 고려 현종은 거란이 침공하자 나주로 피난 갔다. 외침을 받자 왕실이 옮겨갈 정도로 나주는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현종은 이 공을 잊지 않고 1018년 ‘전라도(全羅道)’라는 지명을 세웠다. 전주와 나주는 이때부터 호남의 웅도가 됐다. 이 때문에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 전라북도는 2018년 전라도 정도(定道) 1000년 기념행사를 함께 열었다.
개경과 서경에서 행해지던 팔관회를 나주에서 개최했다. 나주의 금성산에 고려에서 유일하게 다섯 산신을 모시는 신사를 설치했다.
고려 왕조 말기 1236년 담양의 이연년 형제가 백제 부흥 운동을 벌였는데 나주 사람들이 나서서 이 난을 평정했다. 원나라 침입 때 나주민들은 고려 왕조를 등진 삼별초와 싸워 나주성을 7일이나 지켜냈다.
조선 시대에도 나주목은 호남 최대의 도시였다. 동학농민운동 때도 동학군이 점령하지 못한 도시가 나주였다. 1895년 갑오개혁의 하나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23부제로 개편했을 때도 나주부는 건재했다.
그런데 23부제가 13도제로 바뀌는 1896년 전라도를 남북으로 나눌 때 나주부 관찰사의 처소를 광주로 옮기게 되면서 광주시가 새롭게 발전하게 됐다.
천년 역사를 품은 도시여서 역사 관광자원이 숱하다. 나주읍성을 내려다보고 있는 금성산은 나주의 신령한 산이다. 영산강은 호남의 관문으로 물줄기 따라 조창이 발달돼 영산포구를 거쳐 송악과 한양으로 세곡이 운반됐다.
나주는 고대 마한의 중심지였다. 국립나주박물관,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가 세워져 마한사를 연구하고 발굴하고 있다. 영산강 유역에서 독창적인 문화를 꽃 피웠던 동북아 고대 해상왕국 마한의 숨겨진 역사가 다시금 소환되고 있다.
나주는 인물이 많이 나는 고장이다. 장화왕후 오씨와 혜종, 정지 장군, 조선시대 최부, 박순, 신숙주, 정가신, 이발 등과 같은 큰 인물이 즐비하다. 임진왜란 의병장 김천일, 거북선을 건조한 나대용 장군과 함께 한말 의병 김태원 김율 형제, 독립운동가 박동희가 역사의 바통을 이어 받는다.
나주시 대호동 성향(姓鄕) 공원에는 나주김씨·나주정씨·나주나씨·금성범씨·나주오씨·나주최씨·남평문씨·금성나씨·나주임씨 등 나주를 관향으로 하는 성씨들의 내력을 기록한 비석들이 즐비하다. 나주는 70여 개 관향 성씨들의 고향이다.
한말 호남의 의병은 나주에서 최고조로 불타올랐다. 김태원·김율 형제, 박사화를 비롯한 박민홍·박근욱·박화실 등 밀양 박씨들의 의병, 김창균과 그의 자녀 김석현·김복현(김철), 손자 김재호로 이어지는 민족운동가들이 모두 나주 출신이다. 임진왜란 의병에서 한말 의병까지 구국에 앞장섰던 호남 의병들의 역사는 나주의 역사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곧 나주에 문을 여는 의병역사박물관에 남아 청사에 빛날 것이다.
1929년 학생독립운동은 당시 나주역에서 일어난 한·일 학생 충돌이 발단이 됐다. 나주역이 그 진원지다. 나주목사 내아, 남고문 등 나주읍성 4대문, 금성관, 나주향교가 역사유적으로 도시를 빛내고 있다.
천년 역사의 저력과 많은 인물을 품은 도시, 나주시는 이제 서남해안 시대를 주도하며 ‘새로운 천년’을 준비하고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 ‘고려사 열전’(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장화왕후 전설의 문화적인 의미와 효용적 가치’(비교민속학회, 2001, 표인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