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시대가 변하면서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 어디에 살고, 무슨 브랜드의 옷을 입으며, 어떤 걸 먹는지가 훨씬 '더' 중요한 사회가 됐습니다. 같은 가죽 가방일지라도 NO 브랜드 제품은 10만원이지만 에르메스가 만들면 1억원에 팔립니다. 바야흐로 '찐 브랜드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합리적인 선택이 미덕인 사회지만 그럴수록 강력한 브랜드 파워를 갖춘 기업만 살아남는 현실은 역설적입니다. 인간의 이성을 한순간에 무력하게 만들고, 기업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파워 브랜드의 뒷얘기를 살펴봅니다. 하나의 브랜드를 키우기 위해 뼈를 갈아 넣는 기업들의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누군가는 부의 1% 기회를 발견하길 바랍니다.
"쉽게 말해서 아무나 하고 섞여서 운동하고 싶지 않은 거죠. 시간당 수백만원씩 버는 사람들이 하루 1~2시간씩 할애하는 헬스를 '어중이떠중이'랑 같이하고 싶을까요? 시그니엘은 상위 1%가 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잘 마케팅한 거죠."(시그니엘 입주민)
사기꾼들은 왜 높은 집을 좋아할까. 국가대표 펜싱 선수였던 남현희씨와의 결혼 스캔들로 화제를 모았다가 지금은 범죄자 신세로 전락한 전청조의 사기무대는 대한민국 '부의 상징' 시그니엘이다. 시그니엘은 전 전청조·남현희 커플이 동거한 집으로 알려지기 전부터 이미 조인성, 클라라, 김준수, 야구선수 황제균·지연 부부 등 성공한 연예인들의 거처로 유명세를 탔다. 실제 이곳에는 연예인 외에도 유명 유튜버 로얄남(19만6000명), 안대장TV(28만8000명), 치유(19만1000명) 등이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본인의 채널을 통해 시그니엘 거주 사실을 슬쩍 흘리거나(?) 아예 전용 콘텐츠로 만들기도 한다. 이런 콘텐츠들의 흥행 실적은 기대 이상이다.
익명을 요구한 유튜버는 "시그니엘에 입성하는 순간 SNS상에서는 선망의 대상이 되고, 구독자 수나 팔로어 수도 폭발적으로 늘어난다"며 "돈 좀 번다 하는 '관종'들이 이곳에 살고 싶어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말했다. 그는 "월 수익 1억원을 찍으면 꼭 입성하겠다고 스스로와 약속한 곳"이라고도 했다. 본인을 '흙수저'로 칭하는 관종들은 왜 시그니엘을 열망하는 걸까. 자본주의를 추종하는 인간들의 선한 욕망과 추악한 본능이 공존하는 마천루, 시그니엘의 브랜드 탄생 스토리를 전청조의 사기 행각을 통해 짚어봤다.
"에베레스트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그곳에 있기 때문에 존재 자체가 도전이다."
영국인 탐험가 조지 말로리가 "왜 에베레스트여야 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내놓은 답이다. 1924년 3월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올랐던 조지 말로리는 이 도전을 끝으로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그 이후에도 에베레스트는 사망률이 40%에 육박하는 위험한 산이지만 늘 도전자들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인류는 왜 이렇게 높은 곳을 갈망할까. 고대 신화의 바벨탑 이야기, 이집트의 피라미드, 마추픽추의 공중도시 등 인류의 역사는 하늘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려는 도전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명이 발달한 후에 세워진 중세 고딕 양식의 성들도 마찬가지다. 높은 곳에 대한 인간의 열망은 현대에도 이어져 일류 기업의 CEO 집무실은 대부분 초고층 빌딩 꼭대기에 위치한다. 서울에서 가장 비싼 집 역시 초고층 아파트의 펜트하우스다.
시그니엘은 한국에서 가장 높고 세계에서는 5번째로 높은 건물이다. 지상 123층, 높이 555m다. 시그니엘이라는 브랜드는 롯데그룹이 만든 호텔롯데의 최상급 상품으로, 영어 단어 '시그니처(Signature·상징성)'와 롯데(LOTTE)의 'L'을 합쳐 탄생했다. 각 나라의 도시를 대표하는 시그니처 호텔을 만들고 싶다는 의미다. 한국에는 서울과 부산에 각각 1곳씩 있다. 76~101층 사이에 위치한 시그니엘 서울 호텔의 하루 숙박료는 주말 기준 100만~800만원(1일), 평일 60만~70만원 선으로 가장 비싸다.
한국에서 가장 비싼 오피스텔이기도 한 시그니엘 레지던스는 이 건물 42~71층에 위치해 있다. 223실 규모의 오피스텔인데 공급면적은 209~1245㎡, 전용면적은 133~829㎡ 정도로 대형으로만 구성됐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슈퍼 펜트하우스의 가격은 400억원대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장 대중적인 전용 205㎡의 현 시세는 보증금 5억에 월세 3000만원 선이다. 이곳의 강점은 입주민 커뮤니티, 멤버십 식당, 최고 수준의 보안 서비스 등으로 알려졌다.
◆없는 걸 있게 만든 브랜드의 힘...뒤틀린 욕망의 무대
전청조의 사기무대는 시그니엘 레지던스 42층이다. 이곳은 입주자들만 이용할 수 있는 전용라운지로 일종의 휴게실이다. 이곳에서 전청조는 피해자들과 접촉하며 친분을 쌓았다. 다수의 언론을 종합하면 전청조는 시그니엘 커뮤니티에서 만난 유튜버 A씨에게 본인이 파라다이스 그룹 혼외자이며, 글로벌 기업 엔비디아의 대주주라고 속여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뒤 A씨 수강생들에게 접촉해 투자를 명목으로 수억원을 가로챘다. 피해자들은 공통적으로 "전청조가 시그니엘에 살았고, 입주민들만 끼워주는 1% 투자정보이며, 너희(피해자)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 내가 선택한 자만 투자할 수 있다"는 말에 넘어갔다고 말했다.
전청조가 자극한 건 '특별하고 싶다'는 인간의 본능이다. 입주민 자체가 대한민국 상위 1%라는 희소성, 시그니엘에 사는 사람들만 참여할 수 있는 특별한 모임에 '소속됐다'는 우월감 등 빠른 성공에 목마른 이들의 감정을 자극했다. 이들은 피해자이자 가해자로 서로 물리고 물렸다. 그리고 자신의 특별한 지인들에게 또다시 전청조의 투자클럽을 소개했다.
아카데미 4관왕에 빛나는 영화 '기생충'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사모님 역할의 조여정이 뱉는 말이다. "믿는 사람 소개로 연결 연결, 이게 베스트야. 모랄까 믿음의 벨트?" 이는 초창기 명품브랜드가 VIP 비공식 행사로 왜 시그니엘을 선택했는지를 고민하면 이해할 수 있다. 시그니엘은 한 점당 수십억원을 호가하는 시계, 수백억대 고급빌라 등 초고가 상품의 비밀 마케팅 장소로 종종 활용됐다.
한 명품브랜드 관계자는 "시그니엘 자체가 부자들의 사교클럽"이라며 "이들은 복닥복닥한 것도 싫어하고 끼리끼리 모여 살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 부동산 유튜버도 "엘리베이터도 불편하고, 창문도 없고, 바닥 난방이 안 돼서 집이 매우 건조한데도 인맥 때문에 이곳을 떠날 수가 없다"고 귀띔했다.
그런 시그니엘이 최근에는 전청조 사태로 "부자들을 상대로 한탕 하려는 사기꾼들 집합소가 됐다"는 오명을 얻고 있다. 그런 면에서 시그니엘은 태생부터 인간의 욕망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다.
시그니엘은 국내 최초의 6성급 호텔이라고 주장하지만 한국관광협회중앙회는 호텔 품질의 최고 등급을 5성급으로 분류하고 있다. 브랜드 파워만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셈이다. 전청조는 '16세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19세에 정신과 의사면허를 땄으며, 27세에 51조원을 가진 엔비디아 대주주'로 자신을 그렸다. 그런 인물도, 그가 공개한 1%의 투자방법도 세상엔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마천루의 신기루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