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오래가면 병력은 둔해지고 사기가 꺾인다. 성을 공격하면 전투력이 소진되고 오랜 기간 군대를 운영하면 국가의 재정이 부족해진다. 군대가 약해지고 사기가 꺾이고 물자가 소진되면 재정이 파탄 난다. 내부 혹은 인접국에서 제후들이 이 틈을 타 일어나니 이런 상황이 되면 지혜로운 자라고 하더라도 후방의 상황을 감당할 수 없다.”
(<손자병법> 2권 작전 편, 장기전의 위험 지적)
‘사흘 안에 우크라이나를 함락하겠다’던 푸틴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2월 전쟁이 시작된 후 러시아군 사상자는 30만 명, 우크라이나군 사상자는 20만 명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의 사상자가 50만 명 정도에 이르렀다고 미국 관리들을 인용, 보도했다.(NYT, 8.18.) 러시아군 사망자는 12만 명, 부상자는 17만∼18만 명, 우크라이나군은 사망자 7만 명, 부상자 10만∼12만 명인 것으로 집계됐다. 현재 우크라이나군 병력은 약 50만 명이지만, 러시아군은 130만 명 이상으로 관측되고 있다. 사망자는 민간인 집단학살이 포함됐지만 대부분 군인이다.
전쟁을 피해 고향을 등진 난민들도 최대 3천만여 명에 달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치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전쟁 발발 후 최근까지 1600만여 명의 우크라이나 국민이 전쟁을 피해 국경을 넘었다. 다시 귀국한 사람들을 제외해도 800만여 명에 달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이 타국에서 피난민 처지로 살고 있다. 러시아도 20만여 명의 지식인, 중산층이 해외로 나갔다.
두 나라 경제상황도 악화일로다. 국제통화기금(IMF)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우크라이나 GDP는 절반 수준으로 감소했고, 세계은행은 러시아 경제성장률이 2022년 –3.5%, 올해는 –3.3%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NHK 時論公論, 2023.1.12.)
2021년 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라는 미국의 경고 메시지에 국제사회는 ‘설마 21세기에 침략 전쟁이 일어날까?’ 반신반의했다. 군사 전문가들은 ‘세계 2위 막강 군사력을 갖춘 러시아가 전쟁을 시작하면 국방력 순위 25위의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가 30분 이내에 초토화하고, 3일이면 사실상 전쟁이 끝날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침공 초기 기세가 좋았던 러시아군의 조직력 붕괴, ‘나라를 지키겠다’라는 우크라이나군의 벼랑 끝 의지, 미국 등 서방국의 무기 지원 등 변수가 복합적으로 작동, ‘전쟁의 파라독스(paradox)’를 드러냈다.
전쟁은 단순한 수적 양적 군사력 우위가 승패를 결정짓는 요인이 아니다. 첨단 무기로 무장된 병력도 전쟁의 연속성과 지속성을 보장하기 위한 군수지원 능력, 훈련의 성숙도, 지휘부의 지도력 및 항공지원 능력 등 기본여건이 갖춰졌을 때 그 기능을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다.
러시아의 경우, 병력 및 화력 측면에서 우크라이나를 월등히 압도했지만, 개전 초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점령에 실패했다. 이로 인해 러시아는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겪었고, 반격에 나선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군 점령하에 있는 북동부와 동부 돈바스 지역의 영토 탈환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서방국가들의 지원을 등에 업은 젤렌스키 대통령을 중심으로 2014년 뺏긴 크림반도 수복까지 다짐하며 항전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은 이제 20개월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전쟁이 장기전 양상으로 치닫자 푸틴의 고민은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미국을 필두로 서방 여러 나라로부터 지원을 받는 우크라이나와는 달리, 러시아는 점차 ‘공공의 적’ 처지로 전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에너지 등 원자재와 식량값 급등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금리 인상 등을 연쇄적으로 촉발했다. ‘코로나 19’에 따른 글로벌 공급망 붕괴로 이미 침체한 세계 경제에 치명상을 안기고 있어 푸틴에 대한 국제적 비난 여론도 비등(沸騰)해지고 있다.
특히 ‘우군’이라고 믿었던 중국과 인도마저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등, 국제사회에서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러시아 우크라이나 양국은 재차 전열을 가다듬고 있어, 종전 실마리를 찾기는커녕 전쟁은 장기화, 교착국면에 빠져 있다.
이 와중에 자중지란(自中之亂)도 발생했다. 지난 6월 24일, 악명을 떨치는 러시아 민간 용병단체 와그너 그룹이 모스크바로 진격한 군사 반란이 그것이다. 비록 불과 하루 만에 철군하는 등 용병들의 반란은 불발로 끝났지만, 이후 8월 23일 와그너 그룹 수장인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암살 의혹’을 부른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는 등, 푸틴은 안팎으로 여러 어려움에 봉착해있는 상태다.
지난 9월 13일, 푸틴은 러시아 동쪽 끝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날아가 북한 김정은과 재래식 무기 거래 협상으로 의심받는 만남을 갖는 등, 급박하게 움직이고 있다. UN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스스로 유엔 결의를 위반하는 위험한 행보를 펼치고 있다. 그만큼 러시아가 처한 상황이 좋지 않다는 방증이다. 북한의 러시아 밀착을 보여준 이번 회담은 한반도와 무관한 전쟁이 아님을 웅변하고 있다.
전쟁에 고전하고 있는 푸틴의 패착은 이른바 경적필패(輕敵必敗)다. 핵을 가진 초강대국이라 하더라도 스스로 자만한 나머지 준비를 소홀히 하거나 상대방의 능력과 전략을 과소평가할 경우, 전쟁에서 패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손자병법>에서 지적한 ‘장기전의 위험’이 그대로 시현되고 있는 셈이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경구대로 ‘푸틴’의 행태는 미국의 베트남 전쟁 당시 ‘맥나마라’를 상기시킨다. 냉전 시대 미국과 구소련의 대리전쟁으로 불린 베트남 전쟁(1965.11.-1975.4.)은 남북으로 분단된 베트남 통일을 둘러싸고 전개됐다. 미국이 남베트남을 대표해 북베트남 공산주의자와 싸운 이 전쟁에서 84만 9,018명의 군인이 사망했다. 미군 5만 8,318명이 숨지는 희생을 치렀지만,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했다. 최첨단 현대무기로 무장한 세계 최강의 미국을 상대로 물질적 역량으로는 비교할 수 없는 북베트남이 이긴 것이다.
많은 패인 가운데 전쟁 당시 미 국방부 장관 ‘로버트 맥나마라’ 이름을 따서 명명(命名)한 ‘맥나마라의 오류(McNamara Fallacy)’가 꼽힌다. 베트남 전쟁을 기획, 진두지휘한 맥나마라 장관은 1962년 베트남을 방문, “우리의 계량 평가는 미국이 승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호언장담, 정량적 관측만으로 결정을 내리고 다른 모든 요소를 무시했다. 6만여 명에 가까운 전사자를 내고 폭탄을 비 오듯 퍼부었지만 ‘절대 질 수 없는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다. 이는 맥나마라가 정글과 ‘베트남 사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인간의 의지’ 등, 전쟁 향방을 결정할 중요한 요소를 제대로 계량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버드대 조교수와 포드자동차 사장을 지내 당대 최고의 CEO로 평가받던 맥나마라 장관이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오류를 저지른 것은 ‘거울 이미지의 함정’에 빠진 탓이다. 다른 사람이 어떤 대상을 인식하는 방식이 나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나의 잣대로 모든 것을 재단할 때 거울 이미지 함정에 빠지고, 일을 그르치게 된다. 성공한 경험이 강한 사람이 환경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과거의 ‘성공법칙’을 고수, 생각이 굳어버리면 실패보다 무서운 ‘성공의 덫’(success trap) 함정에 빠져 망한다는 대표적 사례다. 2009년 7월 맥나마라가 93세 나이로 영면했을 때 뉴욕타임스는 ‘무익(無益)한 전쟁의 설계사 맥나마라 죽다’란 큰 제목으로 그의 부고 기사를 실었다.
“이제껏 우리는 잘못했다. 정말 끔찍하게도 잘못했다. 우리는 다음 세대들에게 이유를 설명해줘야 할 빚을 지고 있다(Yet we were wrong, terribly wrong. We owe it to future generations to explain why).”(호찌민시:사이공시, 전쟁박물관에 전시된 맥나마라 글 )
푸틴의 책사(策士) 알렉산드르 두긴
냉철한 판단과 과감한 개혁으로 역사상 러시아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높은 지지를 받아온 푸틴은 그동안 ‘전쟁’으로 집권 연장에 성공, 이제 종신 집권의 길에 들어섰다. 푸틴은 집권 후 체첸, 조지아, 크림반도의 침공을 승리로 이끌었다. 푸틴의 위상을 높이고 장기 집권의 결정적 기반이 됐다. 내년 3월17일 임기 6년의 ‘대통령 선거’를 앞둔 이번 전쟁도 그 연장선이었다. 1930년대 히틀러나 일본이 침략 중독증에 빠진 것과 비슷한 패턴으로 이른바 ‘푸틴이즘(Putinism)’의 국제정치적 발현이다.
러시아는 23년째 정치국도 중앙위원회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1인 독재체제를 구축, 푸틴 단 한 명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다. 푸틴은 언젠가 자신이 묘사했던 것처럼 ‘권력의 수직선(vertical of power)’이다. 하지만 지금 그 수직선은 여느 때보다 불안정해 보인다. 푸틴 대통령은 합법적인 선거절차를 거치며 집권해왔지만, 끊임없이 ‘외부의 적’을 만들어 내부 단합을 도모하면서 러시아의 ‘절대 존엄’으로 통치해왔다.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도 내년 대통령 선거와 장기 집권을 의식한 인기몰이라는 비판이 그래서 제기된다.
이번 전쟁 배후에는 사전 선거 공작과 함께 푸틴의 사상적 스승이자 푸틴 팽창주의 외교정책 입안자인 알렉산드르 두긴(Aleksandr Dugin)이란 배후 존재가 감춰져 있다. 1962년생으로 모스크바대 교수인 그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극단적 민족주의 성향의 파시스트 정치사상가다.
애초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반체제 인사였던 두긴은 1990년대 소련이 해체될 무렵 서방의 영향력에 대항해 러시아가 세계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창했다. 두긴은 아일랜드 더블린에서부터 러시아의 극동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르는 유라시아 제국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 1997년 저작 도서 <지정학의 기초 : 러시아의 지정학적(地政學的) 미래>를 통해 이름을 얻기 시작했다. 미국에 사회, 인종적인 갈등과 불안을 퍼뜨릴 것을 주장한 이 책은 당시 러시아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하지만 당시 혼란스러운 시장경제의 봇물에 휩쓸려 애국심을 강조하는 젊은 국수주의자의 작은 목소리에 그쳤다. 이후로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두긴의 극우 민족주의적 사상은 2000년 들어 푸틴의 ‘팽창주의 야욕’과 결합, 강력한 불꽃을 일으켰고 서서히 러시아 정치권의 주류 국책(國策) 이데올로기로 떠올랐다. 두긴은 또 “푸틴에게는 적이 없다. 설사 있을지라도 그들은 정신적으로 병들어 검진을 받아야 한다. 푸틴은 절대적이고, 대체 불가능하다.”며 푸틴 정권에 대한 지지 표명에도 앞장섰다.
2007년 저작인 <푸틴 대 푸틴>에서는 푸틴이 실증적이고, 조심스러운 ‘달과 같은’ 속성과 유라시아 제국의 부활, 서방과의 대결에 몰두하는 ‘태양과 같은’ 속성, 두 가지 특질을 지니고 있다고 분석했다.
두긴은 러시아 제국의 부활을 강조하고 우크라이나 침공의 명분이 된 이른바 ‘유라시아리즘’(Eurasianism)의 창시자다. 푸틴 대통령 역시 소련의 붕괴를 ‘역사적 비극’,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언급할 정도로 냉전 시대 세계질서를 양분했던 소련의 과거 시절에 대한 향수를 종종 드러냈다.
러시아가 국제질서에서 패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두긴은 오래전부터 ‘우크라이나 침공’을 주창해왔다. 두긴은 <지정학의 기초>에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합쳐질 운명이다. 절대로 독립국으로 내버려 두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에 동화되길 거부하는 우크라이나인에 대한 혐오도 숨기지 않았다. 2014년 5월 우크라이나 오데사에서 친러시아 시위대 수십 명이 사망했을 때 “우크라이나는 지구상에서 사라지든지 처음부터 다시 (나라를) 시작해야 한다”며 각계각층, 지역에서 전면적인 반란을 일으키라고 선동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인 2022년 3월에는 현지 매체에 “‘태양과 같은’ 푸틴이 승리했고 이는 이미 예정돼 있다”라면서 “러시아는 루비콘강을 건넜고, 개인적으로 이것이 매우 기쁘다”라며 서방은 러시아를 무너뜨리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두긴은 자신의 SNS 텔레그램 채널에 “러시아 사회 전체가 전시 조직 체계를 갖추지 않으면 이번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며 “러시아는 하나의 문명으로서 서방에 대항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끝까지 갈 것을 의미한다”는 비장한 글을 올리기도 했다(NYT). 두긴은 러시아 방송에 출연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이 있으며, 러시아는 결코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도 했다.
<손자병법>은 ‘전쟁은 국가의 중대사(큰일)이다. 국민의 생사, 국가의 존망이 결정되는 길이니 깊이 살피지 않을 수 없다.’(國之大事 死生之地 存亡之道 不可不察也:국지대사 사생지지 존망지도 불가불찰야)고 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푸틴 예상과 달리, 갈수록 꼬이는 형국으로 치닫고 있다. 궁지에 몰린 푸틴이 핵무기 버튼을 만지작거린다는 보도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넘어 세계적 재앙으로 이어질 어두운 전조(前兆)를 보는 것 같다. 북·중·러 대 한·미·일의 신냉전 구도가 고착화되는 가운데 최근 우크라이나 문제로 얽힌 ‘김정은-푸틴 정상회담’으로 한반도가 ‘태풍의 눈’이 되어 패권전쟁 소용돌이 속으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빨려 들어가고 있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리스크는 우리의 처지와 비슷, 우크라이나 전쟁이 결코 ‘강 건너 불구경’일 수 없는 소이(所以)이다.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