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지역혼의 재발견 -나주의 인물’을 연재하려고 합니다. 나주정신을 대표하는 15명을 선정해 매주 1명씩 그들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나주는 나라가 위기에 놓일 때마다 어김없이 의병(義兵)이 일어나 나라를 구하는데 선두에 섰습니다. 청렴하고 강직한 고위 관리들이 많이 배출됐고 문화예술, 경제 분야에서 탁월한 인물들이 많습니다. 이들이 보여준 충의(忠義)와 선공후사(先公後私) 정신, 치열한 삶에 주목하려고 합니다. 본래 전라도의 명칭은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에서 유래됐습니다. 조선후기 행정중심지가 나주에서 광주로 이동하면서 나주의 기능이 약해졌지만 2014년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가 조성돼 한국전력공사를 비롯한 16개 공기업이 이전하면서 도시 발전의 획기적인 전환기를 맞았습니다. 오는 2025년까지 미래를 선도하는 ‘활력경제’, 융성하는 문화관광, 존중받는 농업 농촌, 명품교육, 시민 중심의 혁신행정을 펴 ‘나주부흥’을 이뤄내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나주에는 호남 최초 의병장 김천일(1537~1593)을 비롯해 조선 최고의 로맨티스트이자 시인인 풍류남 백호 임제(1549~1587), 조선 중기 명재상 박 순(1523~1589), 이순신을 도와 거북선을 제작한 나대용(1556~1612), 대신그룹 창업주 양재봉(1925~2010), 조선시대 견문록인 ‘금남 표해록’ 저자 최부(1454~1504), 한글 창제의 주역 신숙주(1417~1475), 고종의 총애를 받은 판소리 명창 김창환(1854~1939),학생독립운동과 5.18민주화운동, 광주여성운동의 ‘대모’ 조아라(1912~2003) 등 쟁쟁한 인물들이 많습니다.
인물 선정에는 천득염 한국학호남진흥원장, 김덕진 광주교육대 교수, 박해현 초당대 교수, 장안영 전 광주일보 논설위원, 이계표 전 나주학회 부회장, 나천수 나주목향토문화연구회장 등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의병(義兵)의 도시
나주는 ‘의병의 도시’다. 조선 선조 때인 1592년 임진왜란을 비롯해 정유재란, 그로부터 300년이 지난 1900년 초 일본의 침략으로 나라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됐을 때 맨 먼저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장 김천일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송제민, 양산룡, 양산숙, 임환이 그와 함께했다. 구한말 일본이 다시 공격했을 때도 나주와 나주사람들이 의병의 선두에 섰다. ‘어등산 영웅’인 김태원, 김율 형제를 비롯해 박사화, 권택, 나성화, 박민홍, 김도숙 등이 그들이다. 나주시가 지난해 발행한 ‘나주의병사’에 따르면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 나주의병은 총 265명이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 전후로 출정한 의병은 240명. 이들은 기록이 있어서 집계된 것이고 빙산의 일각이다. 대다수는 이름도 없이 숨졌을 것이다. 민간인 출신인 의병이 강한 외국 군대에 맞서 싸운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의병활동에 대한 정부 차원의 포상이 없었다. 오히려 호남의 의병장 김덕령은 역모에 몰려 죽임을 당했다. 나주는 자기 희생을 무릅쓰고 민족운동의 선두에 서서 외세에 맞서 싸웠다. 이것이 곧 ‘나주정신’이요 나주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순천대 사학과 이욱 교수는 “명분과 의리를 중요하게 여긴 유교적인 전통과 향촌공동체, 민족공동체를 지키려는 공동체의식에 따른 의거”라고 설명한다.
취재팀이 ‘나주정신’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첫 인물로 김천일을 정하는 데 어렵지 않았다. 많은 역사학자와 나주의 향토사학자들이 모두 그를 꼽았기 때문이다.
◆원칙 지키다 파직, 고향서 후학 양성
임진왜란이 나던 때 김천일은 고향인 나주로 돌아와 후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당시 나이 53세. 경기도 수원부사(水原府使)를 지내다 파직된 것이다. 수원부사 시절 특권층이 탈세한 사실을 적발하고 “백성을 앞세워 누구나 균등하게 세금을 내야 한다”며 엄벌했다. 원칙을 중시했다. 결국 토호세력의 반감을 사 밀려났다.
이윽고 일본은 명나라를 치기 위한 준비를 마치고 조선에 사신을 보내 ‘假道入明(가도입명)’을 알린다. 명나라에 들어가려고 하니 길을 비키라는 것이다. 조정에서는 깜짝 놀라 이 사실을 명나라에 알리고 경상도, 전라도 연안에 성을 쌓고 변방수비를 강화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왜군은 곧바로 부산포에 침입해 경상좌수영군을 격파하고 부산성까지 순식간에 점령했다. 두 달 만에 전 국토를 손아귀에 넣었다. 선조는 서둘러 의주로 피신했다.
◆고경명과 거병 결의
김천일은 담양의 고경명(高敬命) 등 동지들을 찾아가 거병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는 6월 3일 의병을 모아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며 수원에 도착했다. 병력은 1000명을 훌쩍 넘었다. 그가 수원부사로 일했던 연고가 있어서 지원자가 늘어난 것이다. 전라병사 최원의 관군과 합세해 7월 하순 강화로 이동한다. 선조는 뒤늦게 김천일의 봉기 소식을 듣고 장례원 판결사라는 벼슬을 내리고 창의사(倡義使)란 이름으로 의병장에 임명한다. 김천일이 일주일 정도 강화도에 머물렀지만 서울 탈환의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의 군대가 개성을 향해 남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또 나라에서 교지를 내리고 적을 추격하라고 명했다. 김천일은 “내가 죽을 곳을 얻었다”며 관군들에게 뺏기고 남은 의병 수백명을 이끌고 강화도에서 철수, 남쪽으로 향한다. 이어 적이 진주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진주성에 입성, 경상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등과 목숨을 바쳐 성을 지키기로 맹세한다.◆진주성 2차 전투
명나라는 벽제관 전투에서 져 위축되고 왜군도 행주산성에서 크게 패해 양측은 휴전협정을 맺는다. 특히 ‘진주성을 서로 비워두자’는 공성책(空城策)에 동의한다. 왜군은 서울에서 철수해 퇴진하기 시작했다. 속으로는 휴전으로 명나라 군사를 약화시킨 다음, 진주(晉州)를 다시 공격해 지난해 1차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고 호남으로 진격해 다시 북상하려는 술책을 품고 있었다. 진주는 호남으로 통하는 요충지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는 주력부대가 경상도 동래와 김해에 집결하고 후속부대가 밀양에 도착하자 부대를 재편성해 진주성 공격을 명령한다. 총 병력 10여 만명이 4개 방면에서 공격했다.
또 상주와 부산, 김해, 웅천, 창원에서 진주성까지 군량을 지체 없이 운송하라고 명했다. 당시 진주성에는 조선 관군과 의병이 6000여 명과 주민 7만여 명이 있었다. 애당초 상대가 되지 않았다.
◆진주성 무너지면 호남 침략
당시 조선은 기본질서가 허물어져 있었다. 계속된 기근과 질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도처에서 도둑질이 성행했다. 관리들은 명나라 군사를 돕는다는 핑계로 백성들의 곡식을 빼앗았다. 많은 관리나 관군들은 명나라와 일본이 합의한 공성책(空城策)에 찬동했다. 김천일을 비롯한 일부 장수들은 “진주성을 사수해 호남을 지켜야 한다”며 조정에 주장했지만 허사. 결국 3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결연하게 진주성에 들어간다. 뒤이어 충청병사 황진(黃進), 경상우병사 고종후(高從厚), 사천 현감 장윤(張潤), 의병장 변사정(邊士貞), 민여운(閔汝雲), 이계련(李繼璉)도 군사를 거느리고 속속 입성했다. 우도절제사(右都節制使) 김천일을 중심으로 전투부대를 편성하고 전군에 만반의 준비를 명령했다. 왜군이 마침내 진주성을 공격해 왔다.진주성은 지리적으로 천혜의 요새다. 남쪽은 촉석루가 있고 남강에 접한 절벽이 있다. 서북쪽은 늪을 이뤄 적들이 들어오기가 어렵다. 공격받을 만한 곳은 동쪽뿐이었다. 철저하게 수비하고 외부 지원만 뒤따른다면 쉽게 함락될 수 없는 곳이다.
“나의 죽음은 거병때 결심”
김천일은 진주성 수비주장으로 총지휘했다. 1593년 6월 21일 ‘9일 전투’가 시작됐다. 왜군은 온종일 진주성 안쪽에 포탄을 퍼부었다. 의병들은 대나무와 판자를 엮어 방패를 만들고 왜군을 향해 뜨거운 물과 횃불 뭉치를 내던지며 수비했다. 큰 비가 내려 축대가 무너지고 성벽 틈으로 물이 새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나빠졌다. 문제는 후방 지원이 없다는 것이다. 김천일은 명나라 군사나 관군의 지원을 요청하는 구원특사를 보냈지만 아무 기별이 없었다. 성안의 군사와 백성들은 탈진상태에 이르렀다. 9일째 되는 날, 오후부터 많은 비가 쏟아져 동쪽 문이 무너졌다. 적들이 성벽을 무너뜨리고 물밀듯이 쳐들어왔다. 조선군은 마지막 보루인 촉석루 쪽으로 밀렸다. 성안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속수무책으로 유린 당하고 있었다. 김천일은 몸이 심하게 아파 걷기 힘들 정도였다. 그는 비장한 각오로 곁에 있던 큰아들 상건(象乾)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이어 군부장 양산숙(梁山璹)의 부축을 받으며 최후의 결심을 말한다. “나의 죽음은 의병을 일으킨 날 결심했다. 오늘날까지 이른 것도 늦었다 할 것이다. 다만 그대들은 집을 버리고 나를 따라 온갖 어려움을 겪은 지 2년 만에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대들이 가련할 뿐이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곧 일어나 북쪽을 향해 엎드려 절을 한 다음 먼저 칼을 강물에 내던지고 아들 상건을 껴안았다. 군부장 양산숙이 무릎을 꿇고 급히 외쳤다. “장군, 안됩니다”. 하지만 둘은 이미 남강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김천일은 끝까지 의병의 기백을 보여주며 쉰네살의 삶을 마감했다. 이날 진주성은 왜군 손에 떨어졌다. 김천일이 순절하자 뒤따르던 의병들도 잇따라 진주 남강에 몸을 던져 죽거나 흩어졌다. 김천일의 둘째 아들 상곤(象坤)은 진주 남강에서 며칠 동안 부친과 형의 시신을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치아와 머리카락을 모아 영산강 언덕에서 장례를 지냈다.
◆왜군 물러나 결국 호남 지켜
진주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그들의 1차 목적을 달성했다. 그러나 병력 손실이 막대하고 작전에 차질이 생겨 호남 진격이 좌절돼 철군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김천일의 주장이 맞았다. 그는 목숨을 바쳐 호남을 지켰다.
진주성 함락을 직접 조사 보고한 체찰사 이항복은 ‘백사기사(白沙記事)’에서 김천일을 ‘삼난(三難)을 이룬 사람’으로 평가했다. 3난이란 진주성이 위급할 때 가장 먼저 입성했고 관군이 떠날 때 오히려 성을 사수할 것을 결심한 점, 성이 함락될 때 조용히 목숨을 던진 일이다.
진주성 2차 전투로 관군 2004명이 전사했고 김천일의 의병 3000여 명 가운데 800여 명이 전사했다. 진주성 백성 1만여 명이 사망했다. 역사가들은 확인되지 않은 병력까지 합치면 5000명에서 1만여 명이 숨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조정에서는 김천일의 구국정신과 순절을 높이 평가해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좌찬성(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추증했다.
나주시 대호동 동신대학교 옆에 정렬사가 있다. 김천일 의병장과 아들 김상건, 의병장 양산숙, 임회, 이용재 등 5명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해마다 김천일이 의병을 일으킨 날인 음력 5월 16일 제향행사를 열고 있다. 올해는 지난 7월 3일 치러졌다.
◆김천일 출생과 성장기
김천일은 1537년 1월 10일 나주 흥룡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언침(金彦琛), 어머니는 양성 이씨. 외아들이다.
그가 태어난 다음날 어머니를 잃고 6개월 후 다시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난다. 젖먹이 때 고아가 된 그는 외가에 맡겨진다. 18살 때 군수 김효량(金孝亮)의 딸을 맞아 결혼, 처가의 도움으로 학문을 익힌다. 효행이 지극한 김천일은 자신을 거두어 키워 준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묘 옆에 초막을 짓고 비바람 속에서 3년상을 치른다. 그 때 병을 얻어 평생 몸이 불편했다. 30살이 되자 학문에 매진하기로 다짐하고 유학자 이항(李恒)의 문하로 들어간다. 김천일은 ‘남의 잘못을 탓하면 반드시 화(禍)가 미치고, 남의 악함을 즐겨 들추면 재앙에 이른다’는 좌우명에 따라 수많은 다툼에서 휩쓸리지 않고 화해하는 데 힘썼다. 김천일은 과거시험을 치르지 않고 ‘인재’로 추천받아 37살에 군자감정(軍資監正)이라는 정3품 벼슬을 얻는다. 군자감은 군수품의 저장과 관리, 출납을 맡은 관청이다.
이후 전라북도 익산의 용안(龍安), 임실 현감, 순창군수를 지냈다.
*참고문헌 : 명종실록, 선조실록, 건재집(한국문집총간 1996),소제집(한국문집총간 1989), 일제집(한국문집총간 1988),조원래 ‘임진왜란과 호남지방의 의병항쟁’(2001), 이병태‘호남의병의 귀감 김천일